애스원은 건축왕 람세스 2세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 아부심벨로 인해 유명해진 도시입니다. 누비아와 이집트 경계에 해당되는 도시로 여기서 수단으로 가려면 일주일에 한 번 운항하는 정기 훼리를 타야 합니다. 우리의 여행도 물론 그렇게 구성되었지요. 20일 정도 공을 들여 초청장을 만들고 초청장과 함께 여권은 15일간 대사관에 더 머물다가, 발급예정이었던 출발 5일 전에야 발급불가라는 통지를 주더군요.
그래서 애스원까지는 왔지만 수단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수단은 전통 이집트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쿠시왕조는 수단에서 올라와 이집트의 검은 피부의 파라오가 되어 앗시리아와 페르시아에 의해 식민시대가 시작되기까지 마지막 왕조를 이룹니다. 역사적 스타가 많이 등장하는 신왕조를 잠시 살펴볼까요?
신왕조는 기원전 1570년 투트모스왕이 오리엔탈에서 이집트를 침공해 한동안 지배했던 힉소스를 몰아내며 신왕조를 시작합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딸인 합세수트가 나오지요. 그리고 황금 마스크로 유명한 투탕카멘스가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건축왕 람세스 2세로 이어집니다. 룩소르에서 만난 역사의 인물들이 모두 신왕국 인물이었습니다. 이 끝에 지금의 수단인 누비아에서 쿠시왕국이 올라와 검은 파라오 시대를 엽니다.
23왕조부터 25왕조까지 적지않은 시간 검은 파라오시대는 이어집니다. 그 때는 말콤 X의 외침처럼 ‘검은색’이 아름다운 시대였습니다. 이들이 앗시리아에 쫓겨 누비아로 돌아가며 이집트는 2,500년의 긴 식민역사에 들어섭니다. 애스원에 오면 훤칠한 키에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누비아에서 온 사람들이지요. 카이로나 룩소르의 상인들보다 점잖고 말도 안되는 금액을 불렀다 90%를 깎아주기보다 말도 안되는 적은 금액을 먼저 부릅니다. 이들을 보며, 가지는 못하지만 수단에 대한 꿈을 꾸어봅니다.
현대사의 골칫거리로 꼽히는 테러의 정신적 뿌리가 수단이라고 합니다. 알카에다 외에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이집트에서 실험을 반복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어제 가이드는 재미난 소설이라며 책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 이삭, 모세, 알라가 모두 존재하는 남자로 표현한 가상의 소설이라고 하는 군요.
그런데 이 소설을 쓴 사람을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목을 따 죽였다고 합니다. 최고의 지존에 대한 모독? 어디서 많이 들어본 꽤나 익숙한 표현입니다. 하나의 원칙에서 조금도 빗겨서지 않고 포용과 타협도 없는 건 좋지만 진실이 아닐 때 그 부담을 어쩌려고 그러는 걸까요? 북한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무지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시작은 무지가 아니었으나 무지로 발전한 무슬람 원리주의의 싹이 시작된 곳이 수단의 옴두르만입니다. 알 마흐디는 신성한 교리로 추종자를 모아 당시 수단을 통치하던 영국과의 전쟁을 벌여 대승을 거둡니다. 창과 독침으로 무장한 군대가 현대무기로 무장한 4만의 이집트-영국 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습니다. 영국은 포위된 하루툼을 구하기 위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영웅 고든장군을 총독으로 보내지만 대규모 지원군이 오기 전 하루툼은 마흐디군에 점령되고 그의 목은 성벽에 걸립니다. 이로써 제국주의시대 잠시나마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되는 이상국가가 탄생합니다.
다른 의미로 보면 순수 현대적 독립국이 아프리카에 처음 들어선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이 가만 있을 턱이 없지요. 보다 현대화된 무기를 갖춘 군대가 대규모로 수단을 공격해옵니다. 중장비를 옮기기 위해 사막에 철도를 놓아가며 전쟁을 치른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하루툼과 인접한 옴두르만에서 양국군이 혈전을 벌입니다. 그건 전투라기 보다 사냥에 가까운 살육이었습니다. 이 날 8,000명의 마흐디군이 죽고 영국은 대승을 거두지요. 이로서 이슬람왕국의 꿈은 제국주의에 깨어지고 수단은 13년만에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됩니다. 이 때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모슬렘의 저항과 이슬람 원리에 따른 이상국가의 회복이란 환상이 피어납니다. 그래서 알카에다의 정신적 뿌리를 수단에서 찾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20대의 젊은 종군기자로 이 전쟁에 참여하며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2차 대전 영국을 이끈 기초가 여기서 만들어졌다니 모든 열매는 씨앗이 있나 봅니다. 이 전쟁의 또 다른 수혜자는 영국군을 이끈 호레이서 키치너 장군입니다. 그는 승리의 대가로 나일강변의 엘리판티네섬을 영국왕실로부터 하사받습니다. 그 섬은 지금 식물원이 되어 나일강과 함께 멋진 조화를 이룹니다 .
우리도 이집트 전통 배인 펠루카(Felucca)를 타고 엘리판티네섬을 찾아 나일강을 유람합니다. 애들이 서빙보드를 타고 배로 다가와 노래를 불러줍니다. 작은 팁을 요구하는 아이에게 작은 돈을 건냅니다. 공짜가 아니어도 노래를 불러줘서 아깝지 않습니다. 펠루카는 긴 돛이 뱃머리에 달려있고 돛의 방향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방향을 바꾸는 로맨틱한 배입니다. 2000년에 애스원을 여행한 네덜란드의 칼럼니스트는 석양의 나일강을 가르는 펠루카에 끌려 멀리서 여행 온 여자들이 배에 오르고, 배가 여행객을 싣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 나일강에는 사랑의 소리만 남는다고 합니다.
펠루카에서 이루어진 사랑을 생각하니 클레오파트라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국경에 닿아 이집트 왕실, 아니 클레오파트라에게 전문을 띄웁니다. “가장 아름답게 치장하고 나타나라.” 예의를 다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까요? 클레오파트라는 그 뜻을 알아차렸겠지요. 사랑이 어디 한 쪽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나요? 그녀는 거대한 펠루카를 멋지게 치장하고 갖가지 음식과 보물을 싣고 안토니우스를 찾아갑니다. 물론 그녀의 몸을 가장 아름답게 꾸민 건 당연하겠지요. 그들은 아마 펠루카에서 사랑을 나누었을 겁니다. 강을 유유히 가르는 펠루카가 오늘도 사랑을 싣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애스원을 유명하게 만든 건 사실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입니다. 이유는 위대한 건축물은 모두 애스원에서 돌을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단단한 화강암을 잘라 오벨리스크를 세웠을까요? 이집트인들은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나무를 넣은 후 물을 부어 나무를 팽창시켜 돌을 잘랐다고 합니다.
물론 돌의 결에 따라 잘랐겠지만 작은 나무가 돌을 자르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와 함께 석재건축문화가 뛰어났던 페루도 같은 유사한 방법을 씁니다. 페루에서는 바위 틈에 야마똥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조금 붓고 구멍을 막는답니다. 그럼 똥이 발효하면서 팽창하여 단단한 돌을 자른다고 하니 쇠톱으로 물을 부어가면서 자르는 현대보다 더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애스원에는 아부심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의 여정에는 필라에 사원탐방이 들어있습니다. 코옴보 사원이 그리스양식이라면 필라에 사원은 로마양식입니다. 이유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바리우스가 이집트 문명을 존중하여 이 곳에 사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로마는 자기들의 문화를 제국 곳곳에 심어 미개인들을 개화시켜 제국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하기도 했지만 로마를 거부하지는 않는 한 원주민의 문화도 받아들인 듯 합니다.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카르타고는 폐허가 되었고 로마에 두 번이나 반기를 들었던 이스라엘도 큰 타격을 받았지요. 그 외 로마가 의도적으로 문명을 파괴한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로마를 괴롭힌 갈리아인과 게르마니아도 게사르는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개화시켜 로마의 일원이 되게 했으니 서유럽의 문명 전도사가 로마인건 분명합니다.
로마양식의 정문을 지나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어제 탐방한 코옴보 사원이나 오늘 탐방한 필라에 사원이나 룩소르의 이집트 사원과 사원 구조와 형식, 내용에서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모두 거대 석재건축술이 발달한 문명이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로마나 그리스가 한참 선배인 이집트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존경의 표시로 이 곳에 사원을 짓지 않았을까요?
여하튼 로마가 지은 사원임에도 로마의 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사원 위에 남의 신을 끌어내리고 자기 신을 세웠던 후기의 기독교나 이슬람에 비해 초기로마는 포용력이 느껴집니다. 사원은 아부심벨과 같이 낫세르 댐이 완성되며 수몰되었습니다. 무려 17년이나 수몰된 상태로 있은 후에야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그걸 보여주듯 돌에는 은빛 핀이 박혀있고 핀에는 번호가 쓰여져 있습니다. 사전에 사원을 스캐닝하고 돌에 번호를 메기고 하나씩 그대로 옮겨와 다시 세운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뒤로하고 사원 안에 들어가 봅니다. 필라에 사원은 가장 늦게 세워진 만큼 벽의 보존상태가 좋고, 특히 벽면 조각이 선명하고 세련미가 있습니다. 로마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곡선이 특히 맵시 있습니다. 그런데 벽면 한 편에 십자가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네로 황제의 이름도 가이드가 찾아 보여줍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네로황제는 로마 화재사건으로 위기에 몰리자 범인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합니다. 그리고 제국 내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그로인해 속주인 이집트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이집트의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기 시작하자 그들은 룩소르 왕가의 계곡 지하무덤 뿐 아니라 멀리 이곳까지 도피해 사원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갈망과 네로에 대한 증오를 벽에 남겼습니다. 터어키의 갑파도기아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여하튼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십자가가 깊이 새겨진 벽은 그날의 울림을 전하는 듯 합니다.
낫세르 댐으로 수몰된 사원 중 가장 대표적인 사원은 람세스 2세가 만든 아부심벨입니다. 그의 과시욕이 여기까지 미쳤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여하튼 우리도 내일 아부심벨로 가려하는 데 가이드는 아주 특별한 날이라고 우리보고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일 년에 2번 두 개의 거대한 석상 사이로 사원 깊숙히 빛이 들어오는 데 그 날이 우리가 방문하려는 내일 즉 2월 22일이랍니다.
누군가의 행운이든 일단 즐기고 봐야지요. 가이드는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밤 12시에 출발해서 4시 전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가 그 광경을 볼 것인가? 아니면 4시에 출발해서 오후 1시에 돌아오는 일반 일정을 택할 것인가? 일 년에 두 번 오는 날인데 선택이 달리 있을까요? 어떤 광경일까 벌써부터 두근거려 오늘은 잠을 못 잘 듯 합니다.
밤 12시 애스원으로 향합니다. 일 년에 두 번 2월 22일과 10월 22일은 아부심벨에 특별한 일이 생기는 날이어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궁금증만 더 해갑니다. 아부심벨의 규모는 지금까지 본 어느 사원보다 대단합니다. 특히 다른 사원들은 돌을 쌓아 만든 반면 아부심벨은 거대한 산을 깎고 들어가 그 안에 신전과 석상을 만든 특이한 구조입니다.
산 하나를 신전으로 꾸민 것이지요. 산을 신전으로 바꾼 람세스 2세도 대단하지만 산 하나를 조각내고 조각에 번호를 붙여 그대로 100여미터를 이동해 그대로 재조립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냥 석상이나 건물을 옮겼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산을 조각조각 잘라야 하고 그 안에 만들어진 사원과 석상 역시 조각으로 잘라 안에서부터 하나씩 맞춰나가는 실로 지상 최대의 퍼즐 게임을 해낸 것이죠. 람세스 2세보다 묵묵히 사원을 옮기는 유네스코와 공인의 노고가 빛나는 업적입니다.
아부심벨은 산을 안으로 파 들어가며 종으로 4개의 방을 갖고 있습니다. 해는 위에서 비추기 때문에 햇빛은 평상시엔 입구에서 서성이고 깊히 들어온다 해도 방 두개를 넘지 못하는 데 일년에 두 번 2월 22일과 10월 22일에는 정문을 통과한 빛이 4개의 방을 지나 사원 끝 벽에 새겨놓은 람세스 2세의 상을 비춥니다. 여기에 모여든 이집트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지요.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누비아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검다기 보다 짙은 갈색에 가까운 피부와 오똑한 코, 큰 눈망울과 훤칠한 키, 그에 더해 온 몸을 감은 천 안에 아슬아슬한 치장이 매력을 더합니다. 감추어야 하는 여성은 아쉬움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누비아 여성의 손과 발은 헤나와 다양한 장신구로 짤랑거리고 곱고 짙은 눈망울은 우아한 학 같이 하늘거립니다. 감춘다고 감추어지지 않는 누비아 여성의 아름다움이 섬광처럼 스쳐 정신이 한동안 혼미했습니다. 그래서 몰래 사진에 담아도 봅니다.
수단을 가지 못해 카이로로 되돌아 가야 하는 아쉬움이 오늘따라 더해만 갑니다. 남북의 인종적, 종교적 갈등에다, 석유라는 탐욕까지 붙었으니 수단의 분쟁은 100만의 목숨을 이미 앗아갔거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렸지만 누비아가 낳은 문명의 자식에 대한 향수는 강해만 집니다. 2년 후 다시 수단을 통과하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이번에는 서아프리카의 세네갈에서 위도 10도의 사헬지역을 따라 동으로 즉 프랑스의 횡단정책선을 따라 가보려고 합니다. 그 당시도 영국의 종단선과 프랑스의 횡단선이 만나는 지점이 수단의 파쇼다였습니다. 프랑스가 양보하며 두 나라는 충돌을 피했지만 파쇼다는 아프리카 내륙의 중심이자 동서의 교차점이었습니다. 다음 여행에서는 수단에 갈 수 있을까요? 수단을 지나 소말리아를 거쳐 인도양까지 이어질 사헬지역을 따르는 아프리카 여행이 이루어 질까요?
수단을 넘지 못하여 종단에 큰 구멍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일강을 따라 카이로로 이틀간 되돌아갑니다. 룩소르로 향하던 중 에스나를 찾아갑니다. 에스나. 19세기 말 플로베르라는 작가가 쿠츠크 하넴을 만나 여행기의 박진감을 더해 준 색향이지요. 그런데 그녀가 레바논 여자라는 게 더욱 놀랍습니다. 지중해의 문명을 이리저리 옮겨준 전도사, 페니키아인도 레바논 사람들이고 카르타고도 레바논 사람들이 만든 도시였습니다.
성경에서 브릿세인이라는 바다에서 온 강인한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그들은 누구이길래 지중해에서 이토록 강인한 흔적을 남길까요? 심지어 이 머나먼 에스나의 낭만의 서사시까지… 그녀는 아마도 예술가였을 것입니다. 권위만을 위한 절제된 예술이 아닌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고 내면의 충동에 충실한 그런 예술을 표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예술혼이 없었다면, 춤과 노래가 본능을 자극하는 힘이 없었다면 젊은 플로베르를 그토록 애절하게 만들었을까요? 에스나는 그런 예술가들이 모여 산 색향이었는지 모릅니다.
화려하고 풍요로웠을 색향은 오늘날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닿은 어두운 도시로 변했습니다. 100년이 지나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띄는 사원을 찾아갑니다. 로마의 황제 크라디우스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원은 지금까지 보아온 사원과 같이 거대한 기둥과 역시 거대한 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옛부터 나일강의 도시들은 활발한 무역도시였습니다. 에스나 역시 수단의 누비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던 여러 도시 중 하나로 번성했었습니다. 나일강을 따라가며 살펴 본 룩소르, 에스나, 에드푸, 코옴보, 애스원 모두 나일강을 찬양하는 신들의 도시였으며 이집트인의 정신을 담은 투박한 질그릇이었습니다. 이제 나일강의 종착지 카이로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릅니다.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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