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아름답게 조망하고 느끼려면 어찌해야 할까? 가벼운 질문이지만 대답은 쉽지 않습니다. 고화질 TV가 나오면서 2m의 높이에서 보는 전망은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늘에서 보는 세상이 텔레비전 속 풍경의 주류를 이루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나르는 도구로 세상을 세세히 보기는 어려우니 대지를 내려다 보고 대지가 가진 다양한 질문을 이해하는 곳은 산의 등마루가 아닐까 합니다.
시미엔 트레킹은 이제껏 가졌던 질문에 적합한 답을 주는 트레킹이었습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동쪽 방벽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일 뿐 아니라 대지를 가르며 드러난 맨살의 단층구조, 오랜 시간 풍화와 침식에 의해 다져진 단면 등 대지의 어머니다운 두터운 터울을 겹겹이 지니고 있습니다.
트레킹의 시작지점은 이디오피아 마지막 왕조의 땅 곤다르에서 출발합니다. 차량으로 3시간을 달리면 데바크(Debark)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입산신고를 하고 경찰과 가이드를 배정받고 출발합니다. 다시 22km를 달리면 국립공원 입구를 통과해 롯지 중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시미엔 롯지에 닿습니다. 고도가 3,200m나 됩니다. 이 곳에서 트레킹의 첫 날을 시작합니다. 마치 그랜드 캐년을 옮겨다 놓은 듯한 계곡침하와 단층침식의 중첩된 광활한 대지를 보며 가벼운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수직 고도가 500m나 되는 잠바폭포(Zambar waterfall)까지 트레킹을 즐깁니다. 거대한 절벽을 뛰어내리는 폭포는 물줄기가 점차 얇아지다가 바닥에 닿을 때에는 조그만 가랑비 같아 보입니다. 폭포를 다니다보면 무리진 겔라다 개코원숭이(Gelada baboon)가 보입니다. 한 무리가 30여마리나 된다는 원숭이 무리는 산비탈을 이리저리 뛰며 몸 자랑을 하는데, 우리의 상식과 달리 풀 뿌리나 풀을 뜯어먹는다고 합니다. 세상에 널린게 풀이니 겔라다 개코원숭이의 먹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첫 날 트레킹은 가볍게 몸을 풀며 고도에 적응하는 트레킹이어서 2~3시간의 가벼운 산보로 마감합니다. 여기서 조망하는 일몰은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흐트러진 땅 매무새와 함께 잘 어울리는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둘째 날은 다양한 재미를 찾아 시미엔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의 기착지인 기치(Gich)마을은 전통 가옥인 투클(삼각형의 지붕을 가진 전통가옥으로 동물과 함께 거주)이 스머프의 집 같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입니다. 트레킹 시간은 대략 4~5시간 소요되지만 계곡을 건너면 산릉 위 마을이어서 계곡 맨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만큼 올라와야 합니다. 내리막길이 반갑지 않은 이유입니다. 기치마을은 고도가 3,600m입니다. 약간 호흡이 가빠오기도 합니다. 마을에 닿아 전통 커피 세레머니를 주문해보았습니다.
허름한 투클에 초대되 앉으니 주인 아주머니가 푸르른 커피콩을 쟁반에 놓고 열심히 물로 씻고 장작불에 올린 쇠판에 콩을 볶은 후 나무 절구에 넣어 곱게 빻아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줍니다. 에스프레소라는 명칭이 어울릴까요? 에스프레소는 스팀으로 순간 김을 쏘아 커피를 내리므로 카페인이 적고 얕은 커피기름이 뜹니다. 반면 맛이 가볍고 부드럽지요.
그런데 커피카루를 넣고 끓인 커피는 오랜 시간 달구게 되므로 커피기름이 다 녹아 스며들고 카페인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커피는 쓰기보다 고소하고 부드러웠습니다.동행한 이상윤 선생은 그 아주머니를 로스팅의 천재라고 하는군요. 질 나쁜 커피를 가지고 이렇게 쓰지 않고 부드럽게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건 로스팅을 잘하는 방법밖에 없답니다. 아메리카노만 먹던 저에게도 그리 쓰지 않고 무겁지 않았습니다. 그걸 바디감이라고 한다는군요.
하여튼 커피 세레머니를 하고 야영지로 이동해 첫날의 야영을 했습니다. 넓은 초원에 그림 같은 하늘과 별이 반기는 야영이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는 시간에 비가 내리붓습니다.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 매트를 깐 텐트는 비가 오면서 안이 젖어들었습니다. 텐트에서 잠자기에 불편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축축한 텐트를 피해 산장으로 옮겨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시미엔 트레킹의 마지막 날인 3일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시미엔의 제 3위봉인 이나티에(Enatyie 4,070m)를 넘어 체넥(Chenek 3,600m) 캠프장까지 긴 트레킹을 합니다. 4,000m 능선을 넘어가야 해서 길고 힘든 트레킹입니다. 9시간 정도 걸리고 계곡까지 내려갔다가 반대편 산릉까지 올라간 후 다시 반대편 산 사면을 타고 내려가는 까다로운 구간입니다. 보통 9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우선 전망대인 아이멧 고고(Imet Gogo 3,926m)를 오릅니다. 바위산인 아이멧 고고는 좋은 전망대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고원평원을 감싸는 듯 깊게 패인 계곡을 한 눈에 조망하는 멋진 전망대입니다. 이 봉우리를 지나면 500m를 내려가 다시 600m를 오르는 긴 내리막과 오르막이 기다립니다. 그 끝이 이나티에이고 그 산을 넘어가면 체넥이 나옵니다. 원래의 일정은 체넥에서 야영하고 다음날 시미엔의 2위봉인 라스 부와히트(Ras Buwahit 4,430m)를 오르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3일째 머물며 확인한 시미엔 산은 어김없이 4시경이면 비구름이 몰려와 쏟아붓고 그리고나면 하늘이 맑게 개이는 현상이 반복됩니다.
이미 텐트는 뒤죽박죽이고 더구나 체넥에서는 싸락눈이 내려 젖은 텐트와 매트에서는 잘 수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차량을 불렀습니다. 비가 몰아치기 직전에 체넥에 도착해 비를 피한 후 시미엔 롯지로 1시간 30분 달려가 시미엔 트레킹을 마쳤습니다.
돌아가려는 차량에 두 명의 젊은이가 뒷칸에 타기를 청하기에 태워주었습니다. NGO에서 활동하는 젊은이는 이디오피아 남자와 독일 여자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나킬 분지를 여행할 때 같이 한 이스라엘 아가씨들도 곤다르에서 3개월간 봉사를 하고 귀국한다고 했습니다. 봉사의 내용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맹인들을 모아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구걸하지 않도록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차에 동승한 두 젊은이도 맹인을 위한 기관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열한 태양의 대지에 사는 이 사람들을 세심히 보게 됩니다. 이토록 태양이 강열하건만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습니다. 눈을 다치는 이유가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이유는 아닐까요?
돌아오는 길에 잠시 유태인촌을 둘렀습니다. ‘Welcome to Felesha(훼리샤) village’라고 쓴 팻말이 이미 상업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솔로몬과 시바의 아들인 메넬리크 1세에게 솔로몬은 선물로 언약궤와 함께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선발된 1만 2천명의 학자와 기술자 등 많은 사람들을 주었고 메넬리크는 이들을 이끌고 예맨으로 돌아갔으며 후에 이디오피아에 악숨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악숨왕국은 처음부터 유태교였습니다.
4세기 에자나왕이 기독교로 국교를 정한 이후 이디오피아인은 대부분 기독교로 개종했으니 이를 거부한 집단이 모여 산 마을입니다. 이들은 이디오피아 내 소수였지만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다가 1984년 이스라엘이 7차 중동전쟁의 승리 후 국토확장에 따라 인구증가 정책을 세워 전세계 유태인을 이스라엘로 받아들일 때 10만여명이 이스라엘로 이민갔습니다. 훼리샤 마을은 스스로 유태인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유태인은 핏줄일까요? 유태인을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빌론 유수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되었을 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세우고 경전을 만들며 나름의 집단적 가치를 구현한 집단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즉 같은 이스라엘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바빌론에 남았음에도 그 중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집단이라는 설명이지요. 그들은 공동의 종교와 가치로 똘똘 뭉쳐 하나의 집단 의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유태인은 로마에 대항하다 로마에 쫓겨 세계를 이리저리 유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유랑이 아니라 확산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한 지역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세계로 뻗쳐나간 것이지요. 이로인해 오늘날 세계를 이끄는 핵심 집단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특히 모계를 중시하고 집단적 가치를 중시하므로 어머니가 유태인이거나 개종을 하면 유태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런 유태사회의 수용적인 면도 유태사회를 강하게 만드는 한 측면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정이지만 유태인이 팔레스타인 땅에 그대로 살았다면 오늘날의 유태인의 영광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외부의 지혜와 인재를 빨아들여 단단한 집단으로 성장했다는 설명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2,000여년의 유랑이 아니라 세계로의 확산이라는 표현을 써 봅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여행한 세 명의 이스라엘 아가씨를 생각해봅니다. 같은 20대인데 한국의 젊은이보다 더 강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한국의 젊은 20대 여성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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