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설 연휴 마지막 날인 2월 22일 서점을 방문하여 책을 몇 권 샀다. 아이들이 사달라고 하는 우리나라 역사책들과 함께 내가 읽을 책도 몇 권 골랐다.
대형 서점의 많은 책들 중에서 시선을 빼앗은 책이 하나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사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가 조선에서 벌였던 호랑이 사냥 이야기책 ‘정호기’(출판사: 에이도스)였다.
ⓒ캉스독스 |
그 책을 사면서도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지 호기심 차원에서 구입했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본인도 모르게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책을 읽는 내 자신이 함경도 산골을 뛰어 다니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끼는 감정은 허탈하고 허무한 것이었다. 잘 모르던 진실을 아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호랑이를 쫓는 사냥꾼의 입장, 그것도 조선을 정복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쓴 책인 ‘정호기’는 오랜 기간 동안 우리 산하에서 우리 조상들과 살았던 호랑이나 표범 입장에서는 그들의 학살 이야기나 멸종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생존을 위해 도망가야만 하는 맹수들의 입장이 되는 것 같았다. 일본인 포수들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오직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산, 저 산에서 발버둥치는 호랑이의 안타까운 심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조선의 첩첩산중까지 찾아가서 수백여 명의 몰이꾼을 앞세우고 표범과 호랑이를 잡으려 했을까? 조선이 일제에 의해 멸망하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그렇게까지 하며 호랑이나 표범을 멸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을까?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일본 부호가 엉뚱한 아이디어와 재력으로 정호군(征虎軍)이라는 호랑이 토벌대를 조직하여 조선 팔도를 헤집고 다닌 시기는 1917년이었다. 물론 조선 후기보다는 호랑이, 표범 개체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만 해도 조선 산하에는 호랑이, 표범 숫자가 제법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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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시기에 호랑이, 표범, 곰 같은 맹수들에 대한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사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우리 산하에는 대형 맹수들이 생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호기를 쓴 일본 실업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자기 과시욕이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정호군을 통해 획득한 호랑이 고기 시식회 자리에서 "과거 전국시대(戰國時代) 무사들은 진중의 사기 진작을 위해 조선에서 호랑이를 잡았지만, 이제는 일본 땅에서 호랑이를 잡게 되었다"면서 한껏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마치 자신을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까지 진출하여 수많은 호랑이를 잡아들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비교한 것 같은 생각도 드는 발언이다.
18~19세기 인도와 아프리카를 정복하였던 영국인들도 일본인들과 비슷하게 식민지에서 맹수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그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용맹성과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였다.
이들 정복자들에게 필요하였던 것은 사자나 호랑이 사냥을 통해 집에 걸어둘 트로피와 함께 이로 인한 명성이었다. 영국인 사냥꾼들은 당시 사냥에 필요한 짐꾼이나 몰이꾼을 백인들로 구성하지 않고 식민지 주민들을 현지에서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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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시대가 종언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남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부유한 백인들에 의한 사자 사냥이 자행되고 있다. 그들에게는 멸종 위기동물인 야생 사자에 대한 배려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맹수를 사냥하고, 그를 통한 힘의 과시와 쾌감 밖에 없다.
정호기를 읽어봐도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자주 나온다. 일본인 사냥꾼들은 조선 호랑이 사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짐꾼과 몰이꾼들은 조선 현지에서 조달했다. 심지어 일본 사냥꾼들은 호랑이 사냥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환영인파까지 만들어 내기도 했다.
물론 모두 조선인들을 동원했다. 아마 그런 과정 중에 새로 개척한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의 상징인 호랑이를 사냥하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느 부유한 일본인의 엉뚱한 발상으로 시작된 호랑이 토벌군의 활동을 기록한 정호기. 나라가 힘이 없어 외국에 침탈을 당하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물론 야생동물들까지도 처참한 신세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뼈아픈 그리고 의미 있는 역사적 교훈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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