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지인으로부터 받은 책이 생각납니다. 사회 학자인 루돌프. J 레멀이 2004년에 쓴 '데모사이드'입니다. 그는 데모사이드의 서문에서 '20세기 100년 동안 일어난 모든 전쟁의 희생자는 4천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무려 4배가 넘는 1억 7천만의 사람들은 총알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살해 당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소설의 내용을 풀어갑니다.
즉, 확인된 범죄자인 히틀러, 스탈린, 크메르 루즈 등 대량 학살자가 정권을 잡기 전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그들을 제거하는 이야기입니다. 과거로 돌아가 처음으로 역사를 바꾼 곳이 멕시코이고, 마데로를 지원해 200만명이 희생된 멕시코의 혁명과 내란을 사전에 차단합니다. 그런데 레멜이 2015년에 이 소설을 썼다면 주인공을 다시 한 번 더 멕시코로 보냈을지 모릅니다. 불의에 항거한 43명의 대학생을 경찰이 체포해 마피아에 넘겨 살해한 사건이 2014년에도 있었으니까요,
다시 멕시코로 향한 주인공은 누굴 죽여야 할까요? 누굴 죽여야 멕시코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까요? 데모 진압을 지시한 치와와 시장일까요, 데모대를 마피아에 넘겨준 경찰 지위부일까요, 아니면 무지막지한 마약 마피아 조직 우두머리 일까요? 멕시코는 민중 혁명을 겪은 땅입니다. 혁명 세력은 제도 혁명당을 만들어 71년간 정권을 독점하며 부패한 권력 집단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이 마피아고 그들이 타도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71년 전으로 돌아가 마데로로부터 시작된 불행을 다시 바로 잡아야 할지 모릅니다.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공화정을 택했지만, 막시밀리언 1세가 잠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다시 공화정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공화정은 형식상의 제도이고 식민 시대부터 뿌리내린 대 농장주에서 시작된 독점적 지배 계층 즉, 카우디요(Caudillo)의 권력 독점이 시작됩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대 항해에 나설 때부터 코르데가와 피사로, 알마그 로가 원정군을 이끌고 목숨 건 도박에 나설 때까지 일관되게 하나의 정책을 도입합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과 원정으로 생기는 경제적 수익의 90%는 왕실에 귀속하고, 나머지 10%는 콜럼버스가 소유한다는 내용의 산타페 조약을 맺습니다. 이러한 계약은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국토복원 전쟁에서 시작됩니다. 국가 재정으로 전쟁을 감당하지 못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도록 복원한 국토의 20%는 개인 소유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대 농장 제도인 엔코미엔다(Encomienda)가 시작됩니다.
남미의 엔꼬미엔다는 규모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에는 자기 복재력이 강해 주변을 흡수하며 국토 대부분을 소유하는 거대 정치, 경제 집단이 됩니다. 이런 현상은 남미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구 대륙은 오랫동안 동일한 민족이 동일한 지역에 공존하기 때문에 계급적 갈등이 단순한데 반해, 남미는 백인이 이주해와 원주민을 지배하고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들여와 소유하는 형태여서 계급적 갈등 관계가 더욱 복잡합니다.
더불어 재산권 확대에 대한 저항도 미약하기 때문에 까르딜요 독점 체제는 독립 이후에도 지속되어 발전의 중대 저해요인이 됩니다. 자료에 의하면 독립을 이룬지 100년이 지난 20세기 초까지 1%의 까우딜요가 멕시코의 경우 97%, 페루는 80%의 땅을 소유했다고 하니 불공정한 사회가 남미 이외 어느 대륙에 존재할까요. 아마도 의식 안에 숨겨진 깊은 배신이 그들에게 있었나 봅니다.
남미가 북미처럼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북미는 종교 박해를 피해 가족이나 공동체 단위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고 건너온 땅입니다. 반면 남미는 정복하고 강탈하기 위해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건너온 땅입니다.
그 차이가 크겠죠. 미래의 씨앗을 심은 땅과 강탈자로 건너와 잠시 머물다 떠나려는 사람들이 불행을 심은 땅의 차이는 땅이 다른 게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것입니다. 남미는 남의 것을 최대한 빼앗아 언젠가 떠날 사람들이 사는 땅이니 미래의 투자도, 화합도, 공존도 없습니다. 최대한 빼앗고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 떠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마데로를 중심으로 모여듭니다. 멕시코의 혁명은 1911년, 8번에 걸쳐 대통령이 재선되며 절대 권력을 행사한 디아스를 마데로가 몰아냄으로써 시작됩니다. 디아스는 1876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 8회에 걸쳐 35년간 집권한 독재자였으며, 그의 집권 시절 멕시코의 석유와 광산 그리고 철도 지분의 95%가 외국인의 소유였을 정도로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였습니다.
그의 집권 시기에 국가가 얼마나 국민과 괴리되었으면 “멕시코는 외국인에게는 어머니고, 멕시코인에게는 계모다”라는 조크가 성행했을까요, 아직 백성들은 소수 백인 가스띨요의 노예 상태이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대농장에 종속되어 있어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현실을 바꾸어 보려 마데로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혁명에 성공해 대통령이 되었지만 혁신을 하기도 전에 우에르따 장군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멕시코의 내란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우에르따 정부와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멕시코인의 투쟁으로 전개되면서 멕시코판 삼국지가 펼쳐집니다.
북부의 비적출신으로 빈민의 우상이 된 판쵸비아, 중부의 도시 시민을 대표하는 까란사, 그리고 남부 농민 군대를 이끈 사파타, 세 명의 영웅이 우에르따의 정부를 향해 맹렬히 일어났고, 우에르따를 몰아냅니다. "혁명에는 동지가 있어도 탈 혁명기에는 적만 있다" 멋진 말을 한 번 만들어 봅니다. 혁명에 성공한 위대함을 퇴색시키는 탈 혁명기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혁명의 피로감과 미래에 대한 조급함이 원인은 아닐까요?
한 나라를 세운 유방은 한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고, 불세피키 혁명을 이끈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살해 당합니다. 모택동은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유서기에서 죽음을 선물했습니다. 그 뿐일까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임진란을 일으켜 혁명 에너지를 소진시켰습니다. 혁명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는 탈 혁명기의 내부 쿠테타, 혁명의 나라 멕시코도 같은 역경에 휩싸입니다.
판쵸비아는 북부를 지배하며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학교를 설립해 교육의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빈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여 "가난한 자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까란사에 의해 암살 당합니다. 농민의 영웅 사파타 역시 농민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했으나 까란사의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고 멕시코 혁명은 까란사의 도시 시민군대에 의해 종료됩니다. 그리고 여러 정파가 모여 만든 제도 혁명당이 멕시코를 통치하는 정당 독재 시대가 시작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세 명의 영웅은 근거지도, 지지 기반도 너무도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사람의 운명이 대립으로 끝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제도 혁명당은 선거에서 패하기까지 71년을 집권하는 진정한 독재 집단이었습니다. 또한 당내에서 차기 대통령 지명권을 사용했으며, 의원직과 지방 지사까지 95% 이상을 장악하는 절대적인 지배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멕시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옵니다.
1994년 대통령이 된 세디요 대통령은 새천년의 선물로 차기 대통령 지명권을 포기하고 공정한 선거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선거의 30%도 개표가 안된 상황에서 야당이 앞서 나가자 공개 기자회견을 갖고 제도 혁명당의 패배를 인정하며 야당 대통령 후보자를 찾아가 축하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입니다.
전국을 장악한 제도 혁명당의 반격과 선거 조작, 그 어떤 가능성을 미연에 막아버린 그의 용감한 행동으로 멕시코는 71년만에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었습니다. 이야기로 풀어 본 멕시코는 혁명과 민주주의의 아름다운 승리를 일구어 낸 나라입니다. 그런데 치와와주에서 일어난 43인의 대학생은 왜 공권력에 의해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멕시코에는 어떤 불편함이 숨어있는 것일까요? 정치인, 관료 그들이 마피아고 모두 도둑놈이라는 가이드의 분노한 표정이 치와와 시청사와 오버랩되면서 강한 의미로 남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방문한 치와와시에서 생각지 않게 생가를 방문합니다. 미국 영화에 바보스럽고 무지한 뚱보 산은 그를 희화화 한 것입니다. 미국은 건국 이후, 단 한번도 외국 군대의 침략은 물론 미국 영토에 발을 딛어 본 군대가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 자부심을 깔아 뭉게고 우에르따 정부군을 쫓아 미국까지 깊숙히 들어갔던 판쵸비아의 배짱이 미국의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미국이 판쵸비아를 바보로 만들면서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지만 판쵸비아는 치와와의 영웅입니다. 그는 20번의 결혼을 했고, 그의 대저택은 두 번째 부인에게 남겨준 유산입니다. 참 부러운 남자입니다. 20번의 결혼이라니… 아마도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니며 정의를 실천하는 그에게 딸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멕시코 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도 세계 곳곳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누구도 저에게 딸을 주려고 하지 않네요. 저와 판쵸비아의 차이는 정의를 행하는 용기의 차이가 아닐까요? 저도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를 더 키워야겠습니다.
판쵸비아 박물관을 나와 치와와 주 정부청사를 찾아갑니다. 43인의 대학생을 살려내라고 데모하려는 것도 아닌데 걸음이 나름 비장합니다. 주 정부청사 내부에는 멕시코 혁명의 불을 당긴 이달고 신부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운 백성과 함께 하려던 목회자 였으며, 이를 실천에 옮긴 행동가 였습니다.
카톨릭 교회가 정권과 결탁해 부를 축적하고 인디오를 외면했다고 하지만 남미가 아직도 열렬한 카톨릭의 땅으로 남게 된 데는 이달고 신부 같은 목회자의 자기 헌신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불의에 항거하고 권력이 아닌 서민의 편에 서서 고통을 나눈 그들의 숭고한 행동이야 말로 혁명 멕시코의 등불이었습니다.
두번째 혁명의 깃발을 든 사람도 카톨릭 신부인 모랄레스 신부입니다. 이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인디오의 편에선 용감한 행동가 였으며, 양심에 따라 순교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이달고 신부를 추모하는 거대한 걸개 그림과 조각상에 서니 세상의 변화를 이끈 위대한 용기에 숙연해 집니다.
기념관을 나와 광장을 걸으니 쓰레기 더미와 함께 소각된 43인의 대학생에 대한 분노가 다시 끓어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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