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아름다운 코스타리카는 풍요로운 해변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녹음도 그에 못지않게 풍요롭고 짙어서 식물 종은 아프리카 대륙에 비교될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산호세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 꽉 막힌 도로를 보면 개발국의 교통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멕시코 시티, 과테말라 시티, 산호세 지금까지 방문한 수도의 일반적인 모습은 꼬리를 무는 차량과 이를 소화할 만큼의 대체 도로를 갖지 못한 도시였습니다.
멕시코 시티는 예외지만 과테말라 시티나 산호세는 수도라고 하기엔 수수할 만큼 중심대로를 벗어나면 한가롭습니다. 차량 정체도 출퇴근 시간에만 집중됩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는 여러 편의를 도모하기에 수요 부족을 겪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출퇴근 시간만 잠시 넘어가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대규모 투자를 할까요, 중미의 도시들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 교통 정체를 일상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코스타리카는 과테말라보다 시골의 분위기를 갖고 있고, 자연적이지만 깨끗하고 서구화된 모습입니다. 이는 길가를 메운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흑인은 고사하고 인디오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운전사는 한가한 시골길에서도 한참을 좌우로 살피고, 차량을 회전시키며 오가는 차량이 없어도 교통 신호를 어기지 않습니다. 횡단보도에서는 어김없이 속도를 줄이고 보행자를 살핍니다.
이들의 질서 의식과 교육 수준이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 있습니다. 절도있는 행동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하고, 서로 지키려고 애쓰는 사회적 의식을 만드는 데엔 비용이 듭니다. 원시의 자연과 카리브의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사는 작은 중미의 소국, 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가이드가 별도로 나오지 않고 차량 가이드가 운전과 관광지를 안내하는게 코스타리카의 일반적인 여행 패턴입니다. 두 명의 일을 혼자 한다면 인건비가 비싸다는 말이고,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유적지 등 문화 여행 보다는 자연 여행이 주를 이룬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운전사가 장시간 운전하여 지정 장소로 데려다 주는 것이 우선이고 안내자의 설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여행지입니다. 저의 추측이 맞아 떨어진 건 몬테 베르데로 이동하며 처음 찾아든 휴게소입니다. 모든 물건은 과테말라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지만 식당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에서는 서비스 10%, 부가세 등 세금 17%의 비중으로 메뉴에 27%의 세금이 붙습니다. 그리고 식당이나 슈퍼마켓에서도 미국 달러가 불편하지 않게 사용됩니다.
미국이 서브 프라임 사태 후 4조 달러를 풀었다는데 그렇게 찍어내도 폭락하지 않고 든든한 건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달러를 자국 통화처럼 쓰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메스티조가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멕시코나 과테말라에 비해 안정감 있는 나라라고 느껴집니다.
이것도 백인 우월주의로 봐야하나요, 로만이라는 안내자에게서 들은 첫 마디는 코스타리카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코스타리카는 군대를 해산하고 그 비용을 전부 교육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스타리카를 남미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라고 소개합니다. 백인 우월주의가 아닌 정치 우월주의였습니다. 나라가 정치를 잘하니 국민이 배 따시고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군대가 없으니 코스타리카가 택한 방식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세계 유일 평화대학교가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평화는 사랑을 매개로 합니다. 세계는 사랑을 외치지만 사실상 사랑은 쉽지 않은 자기 혁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고집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몸을 부딪히고, 겉살이 해지고 속살이 드러납니다. 사랑을 말할수록 아프기만 합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테러는 '톨레랑스(Tolerance)'의 정신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다른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에 대한 자유의 존중'을 말합니다.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톨레랑스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건 사랑이기도 하고, 사랑이 아니기도 합니다. 남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우선시 되어야 할까, 내 사정과 불편함을 해소해달라고 해야할까 그런 문제입니다. "우린 할아버지 때부터 여기 살았고, 나도 여기 살고 있으며 나의 아들도 여기 살 것입니다. 우린 우리의 방식으로 살아온 문화와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고자 할 뿐입니다." 이 주장에 어떤 이의가 있을 수 있을까요?
누구를 미워하거나 거부하는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불편을 주지 말고, 우리와 다른 사람은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는 요구인데 너무나 정당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유럽에 오게된 타대륙 사람들은 유럽의 요구에 의해 오게 된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피투성적 존재이나 기투성적 존재이다." 라고 말한 철학자의 정의처럼 이들도 어쩔 수 없는 삶의 과정속에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도 이런 말을 하겠죠, "우리가 어디서 살든 우리 방식대로 살게 해 달라" 유럽 대륙에선 유럽 방식에 따라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이는 르네상스 정신을 퇴색시키는 일입니다. 미국의 흑인만이 아닙니다. 유럽의 이슬람도 역사의 산물이고, 유럽이 짊어지고 흡수해야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얼마 전에 만난 프랑스인은 다른 관점에서 불만을 이야기 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불법으로 넘어와 정착한 모슬렘이 프랑스에 많이 있는데 그들은 불법으로 정착한 이민자이지만 아이를 낳으면 속지주의 정책에 따라 영주권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모슬렘은 관습적으로 5명까지 부인을 둘 수있기 때문에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 법으로는 이혼을 하고 다시 고향에서 두 번째 부인을 맞이 한답니다. 두 번째 부인도 아이를 낳으면 여자는 영주권을 얻고 부부는 다시 이혼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수익으로 부인과 아이에게 양육비 지원이 나온답니다. 그렇게 모슬렘 남자가 다섯 번을 결혼하고, 다섯명의 부인이 아이를 여럿 낳으면 작은 마을을 이룰 정도로 번창하는데 그들의 생계를 정부가 지원하는 실정이다 보니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프랑스의 재정이 거덜 날만도 합니다. 그 남자의 불만은 내가 낸 세금으로 왜 그들을 먹여 살리는데 쓰이냐는 것입니다. 아이의 부양은 정부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의도가 숨어 있다면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는 또한 이런 불평도 합니다. 할아버지 시절 아프리카에서 무언가를 빼앗아 왔다면 그건 할아버지 시절에 책임질 일이고, 아버지 세대가 그 혜택을 받았다면 아버지 세대가 책임질 일이다. 우린 젊다. 그리고 우리도 충분히 힘들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닌 우리가 그들을 책임져야 하는가. 민족간, 문화간의 갈등을 넘어 세대간의 갈등으로 까지 유럽은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표현이 특히 독일에서 대중 시위로 자주 나타납니다. 그런데 독일의 사정은 그리 긴박하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6천6백만의 인구 중 325만의 북아프리카 이민자를 포함하여 이민자의 인구가 5 ~ 6백만에 이르러 전체 인구의 10%에 달합니다. 그렇게 보면 톨레랑스를 실천한 나라 답습니다. 톨레랑스는 프랑스 문화의 뿌리인 시민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정신이며,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뿌리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 자유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며 이는 자유와 평화, 포용과 화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대중적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건 독일이 갖은 성향인 듯 합니다. 독일에는 125만의 이민자가 있지만 그 중 75%는 동유럽 등 유럽 내 이민자이며 이민자를 비율로 따져봐도 전체 인구의 0.015%밖에 되지 않습니다. 0.02%도 안되는 이민자가 그것도 경제 개발의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노동 이민자의 1, 2세가 독일을 어떻게 위협할까요, 그나마도 대부분 동구권에서 온 같은 문화권 사람들임에도 이슬람을 콕 집어 위기에 처한 듯 집단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민족성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을까요? 모든 자료와 현상을 종합하면 독일은 이민자에 대해 배타적이고 극열합니다. 독일이 그토록 극열한 건 민족적 특성 때문이고, 집단적 히스테리로 보입니다. 라인홀트 나미(Reinhold Neibuhr)는 "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나 집단은 도덕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는 "학살의 뒤를 캐면 게르만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그래서 불안합니다.
얼마 전 파리와 시드니의 테러로 이슬람에 대한 사회 분위기가 더욱 공격적으로 바뀌어 갑니다. 프랑스와 호주의 정치인들은 테러는 비난하되 이슬람은 존중하며 이슬람과 테러를 분리시키려 합니다. 더불어 대부분의 모슬렘은 온화한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이런 의지가 지켜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히틀러는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주었고, 그것 역시 사랑이었습니다. 민족 사랑, 국가 사랑, 이웃 사랑 그는 민족과 국가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왜 사랑의 메세지건만 다른 얼굴일까요, 그래서 라인홀트 나미가 전하는 메세지에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나 집단은 도덕적일 수 없다"
코스타리카는 화해와 평화의 메세지를 깊이 생각할 여지를 주는 나라입니다. 군대가 없으니 남과 대적할 일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선 남의 사정과 이야기를 듣고 내 사정을 설득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열린 귀와 마음을 가진 사회입니다. 군대가 없으니 군비에 들어갈 천문학적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경제에 튼튼한 밀알이 되어 중미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2015년 기준 일 년 국방비로 37조가 쓰입니다. 70%가 군 유지에 필요한 예산이지만, 남북이 평화 관계를 회복한다면 국방비를 줄여 국민 경제에 도움을 주게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평화가 돈이고 사랑이 투자라는 말이 어긋나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 비용을 산술화 시킬 수만 있다면 한국의 사회 갈등 비용은 한 해 국방 예산보다 많을지도 모릅니다. 평화와 사랑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가치인지 코스타리카는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산호세에는 마땅한 볼거리가 없어서 반나절을 둘러봐도 시간이 남습니다. 첫 탐방지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박물관입니다. 옛 군 요새를 박물관으로 변경했는데, 이것 역시 군대를 해산하며 얻은 수확물이라고 합니다. 박물관에서 저는 대단히 흥미로운 걸 발견했습니다. 마당 한 가운데 놓인 거대한 석구(石球)입니다. 크기가 사람 키보다 크니 무게가 엄청 나갑니다.
마당의 석구 무게는 약 30톤이고 가장 큰 석구는 50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50톤이면 이집트 기자 피라미드에서도 가장 무거운 돌에 꼽히고, 멕시코 테오티우와칸의 태양의 피라미드에서도 그렇게 무거운 돌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고대 선진 문명에서도 50톤의 무게는 다루기 불가능한 최후의 무게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이 돌의 사용처가 건물 옥상이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석구는 코스타리카 남부 해안의 원주민 문화인데, 집을 짓고는 둥근 석구를 건물위에 얹어 지위와 방향을 상징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크기의 석구가 발견되는 것으로 비추어 보아 모두 무거운 석구를 사용하지는 않았겠지만 마당에 놓인 석구는 부족의 여왕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었다고 하니 지위가 높을수록 무거운 석구를 건물에 얹었고, 이렇게 무거운 돌을 건물에 올리기 위해서는 튼튼하고 큰 건물을 건축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석구를 매만지다 보니 30톤의 둥근 돌을 어떻게 건물 위로 올렸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을 했는지, 더욱이 돌을 둥글게 다듬는 일부터 건물에 올리는 과정은 강력한 동인 없이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들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됩니다. 작년에 아프리카 종단 여행 중 방문한 나미비아 사막에서도 덩그런히 놓여진 거대한 석구가 있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석구 앞에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다시 나미비아에 가게 된다면 이번엔 코스타리카와 나미비아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한참을 머뭇거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알려진 바가 없고 세상의 오리무중 중 하나이니 나름의 궁금증은 공부를 많이 한 학자에게 남겨 놓습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유물을 관찰하다 보니 궁금증을 더욱 더 증폭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 상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세발 달린 맷돌입니다. ‘정(鼎)’이라고 불리는 세발 달린 솥 모양의 가구는 중국에서 천자(天子)의 권위와 ‘법통’을 상징했습니다. 태평양 건너 코스타리카에서 중국 문화의 한 단면을 보니 어지럽습니다. 석구만 존재한다면 세계적으로 분포된 거석 문화로 이해하면 될 것인데, 정교한 정(鼎)의 구조와 문화를 복재한 기구를 보고 있노라니 아메리카 최초의 발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콜롬버스는 서구가 내세운 주장일 뿐이고, 최초의 이주자인 코카사스족, 부여와 맥이족이 가져왔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말하듯 아메리카 최초의 발견자는 정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4회의 원정을 통해 동아프리카 뭄바사까지 항해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건국 초기 해양 정책을 추진하던 정화의 환관 세력이 관료 세력의 북방 정책에 밀리며 관료들에 의해 그의 항해 기록은 대부분 소각되었습니다. 정크선 역시 해체되어 건축 자제로 쓰이며 명나라의 해외 팽창 정책은 쇄국 정책으로 돌변 하지만 중국은 정화가 아프리카를 돌아 아메리카에 닿았거나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닿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아마도 그런 증거물인가요? 정화가 전해준 중국 문화가 코스타리카 남부의 해안 부족에 남겨졌다고 가정해 보지만 그러기엔 그들의 미스터리가 너무 거대합니다. 중국과 달리 도기로 만든 기구가 아닌 석기이기 때문입니다. 용도도 솥이 아닌 맷돌이며, 다리가 셋이라고 해서 모두 중국 문화라고 하기엔 억측이 다분히 있습니다.
50톤이나 되는 둥근 돌의 실체가 바로 이 놈입니다. 거석 문화는 영국의 스톤 헤지부터 시작해 이집트의 피라미드, 칠레 이스트섬의 모아이상 그리고 코스타리카의 석구까지 무언가 연관성이 있을 듯 하면서도 무엇 하나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습니다. 정녕 태평양의 '뮤' 대륙과 대서양의 '아틀란스' 대륙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높은 문화를 주변 부에 전해주고 사라졌을까요?
어쨌거나 거대한 석조 문화에 궁금증만 더하고 국립 박물관을 나옵니다. 다음 방문지는 국립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화폐 박물관을 찾아 갑니다. 화폐 박물관은 중앙은행이 운영하는 박물관으로 코스타리카 화폐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전기 수리 중이라고 내일 오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립니다.
코스타리카 커피를 사려고 슈퍼마켓을 찾아 걷습니다. 건물 모퉁이를 돌고 보니 슈퍼마켓이 나오고 종류별로 다양한 커피가 생필품과 함께 진열되어 있습니다. 250g에 $6 정도의 금액이면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커피를 구입할 수 있어 바구니에 가득 챙겨 넣습니다. 물건을 살 때면 항상 줄 사람을 생각합니다.
처음엔 아주 가까운 한 두명을 생각하는데, 커피를 집다 보니 10개도 넘었습니다. 누구도 주어야지, 누군 빼? 그런 셈이 머리에서 복잡해지면서 이내 20개가 넘습니다. 그러다 다시 원위치… 5개만 사며 이젠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가져갈 수 있는 양을 생각합니다. 한 달 여행으로 지금도 짐이 많은데..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다시 2개를 더 내려놓고 종류별로 한 봉지씩 3개만 들고 계산대로 갑니다. 커피 하나를 사는데도 이렇게 복잡한 감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슈퍼마켓을 나와 차로 돌아오는데, 어린 학생들이 유니폼을 입고 불우이웃 모금함을 흔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모금을 위해 열심히 하기 보다는 흥겹게 노래 부르며 분위기를 즐기는 모습이 참여를 위한 행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모금 행위는 너무 경직되고 무거워 웬만하면 피하게 되는데, 여기 아이들은 흥겹게 모금을 즐깁니다.
지금 학생들이 하는 모금은 텔레톤이라 불리는 연말 불우이웃 돕기 행사입니다. 지체 장애가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치료비를 돕기 위한 모금 운동으로 시작은 칠레 텔레비전 ’27시간 모금 생방송’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미 전역에서 연말이면 이루어지는 흥겨운 축제 마당이라고 합니다. 특히 칠레에서는 11월 28 ~ 29일은 전 채널에서는 이 프로그램만 내보낸다고 합니다. 가볍게 지폐를 모금함에 넣으니 어린 꼬마가 즐겁게 미소 지어 줍니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며 저는 장애우와 마주칩니다. 2년이 넘게 광화문 역사를 차지하고 있는 장애우 단체는 장애 등록제 폐지는 곧 사슬이라며 반대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처음엔 서명을 했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러가지 찹찹한 생각이 듭니다. 한쪽엔 임시 막사, 반대편엔 조단을 세워 통로를 반이나 장악하고 이로 인해 2년 넘게 통행자에게 불편을 주는데 지나가는 통행자가 그들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까, 다른 방식의 홍보는 없는 걸까요?
정부는 외면을 넘어 이들을 방치하고 있는걸까요? 맞닿은 살같이 닳고 터지도록 우리 사회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는 외면하는 고질적 대립사회인가요? 을은 다양하게 주변을 살피며 자기 주장을 하고 갑은 물리적인 방법을 선택하기 전에 상대와 대화하고 실마리를 찾아 나간다면 속살 단단한 사회가 될텐데… 결국 대립하고 아우성 치고서야 타협이든 해결책을 찾으니 사회가 병들어도 크게 병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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