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빠루] 제 31부
[노트펫] 초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스피츠견 빠루는 예민한 청각과 후각으로 그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경계 태세를 확립했다. 좀도둑이 많던 시절이었지만 빠루의 존재로 우리 가족의 안전은 늘 “오늘도 이상무”였다. 빠루가 직장인이라면 ‘이달의 우수 직원’으로 계속 선정되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빠루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 5년이 흐른 가을, 엔지라는 어여쁜 푸들이 집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엔지는 전임자인 빠루와는 판이한 성격이었다. 빠루가 주인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를 늘 고민했다면, 엔지는 주인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엔지의 하루는 잠자는 주인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주인의 늦잠은 엔지의 사전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휴일이어도 엔지는 아침 6시만 되면 엄격하게 주인을 깨웠다. 물론 여기에는 엔지의 사심(私心)이 개입됐다.
엔지는 아침이 되면 자신의 빈 밥그릇을 물고 다녔다. 마치 외상값을 독촉하는 주점의 주인 같았다. 아무리 졸려도 엔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필 엔지의 아침밥 당번은 필자였다. 엔지는 다른 사람은 깨우지 않고 유독 필자만 깨웠다.
엔지는 평소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여도 주인이 곁에 있으면 직접 하지 않았다. 만약 주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일에 관심을 두면, 주인의 다리를 앞발로 긁었다.
자신에게 주목하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장난감 같은 것이 있는 쪽을 향해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만약 주인이 가져다주지 않으면 끙끙거렸다. 엔지는 개와 사람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들게 만드는 개였다.
엔지는 주인 품을 좋아했다. 주인과 함께 하는 동적인 행동인 산책 대신 정적인 교감을 좋아했다. 학창시절 도서관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날이면 필자의 다리와 무릎은 온전히 엔지의 차지였다.
엔지는 몇 시간씩 주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지만 이내 잠이 들곤 했다. 배변을 누고 싶은 변의(便意)라도 느껴야지 일어났다.
그런데 그런 엔지의 습관이 필자에게 나쁘게는 작용하지 않았다. 자는 것도 사랑스러운 엔지가 깨지 않게 하려고 미동도 않고 책을 볼 수밖에 없었다. 집중력 향상에는 엔지가 최고였다.
그래서 시험기간만 되면 엔지와 함께 책상에서 공부를 하는 것은 개인적인 루틴(routine)이 되기도 했다. 선발투수가 자신의 등판 날에 면도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엔지는 소음 없는 전기차와 비슷했다. 당시 엔지와 같이 살던 시추는 마치 시끄러운 경운기처럼 잠만 자면 코를 심하게 골았다. 하지만 엔지는 조용했다. 주인의 시험공부에 그 어떤 방해도 주지 않았다.
얼마 전 막내아들이 필자에게 “개가 좋아요, 고양이가 좋아요?”라는 심오한 질문을 했다. 주저함이 없이 튀어나온 대답은 푸들이었다.
푸들은 주인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익도 잘 챙기기 때문이다. 행복할 때는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우울할 때는 위로해주는 존재가 푸들이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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