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도사(Mendoza)는 마음을 현혹하는 도시여서 떠나려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안데스도 넘었고, 아콩카구아도 걸어봤고, 양조장까지 찾아보았으니 아쉬울 것 없이 다 해본 거 같은데, 그래도 빼앗긴 마음을 되찾아 오지 못했나 봅니다.
잘 가라며 배웅나온 꼴로를 향해 손을 흔들다 보니 차가 서서히 움직입니다. 버스는 길을 달려 18시간 후엔 바릴로체(Bariloche)에 닿을 것입니다. 물론 더 달릴 수도 있습니다. 40시간에 걸쳐 엘 칼라파테(El Calafate)까지 달리면 ‘Ruta 40’을 만나게 됩니다.
‘Road 40’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꽤나 알려진 길입니다. 도로의 길이로 보면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가 만나는 북쪽국경에서 시작해 멘도사와 바릴로체를 지나고 칼라파테에서도 더 연장되어서 리오가예고스(Rio Gallegos)까지 장장 5,244km 나 됩니다. [RUTA 40(박명화, 박지현 지음)]이라는 여행서적에서 저자는 미국의 루트 66(Route 66), 호주의 스튜어트 하이웨이(Stuart Highway)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긴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국인 친구가 황해의 롄윈강(?云港. 연운항)에서 시작해 시안 시(西安, 서안), 우루무치(烏魯木齊)를 지나 카슈가르(喀什)까지 이어진 고속도로가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라고 저에게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확한 길이는 알 수 없으나 이 도로는 카슈가르에서 다시 파키스탄으로 이어지고 인도양에서 끝나니 중국인 친구의 자랑은 허풍이 아닐 것입니다.
한쪽 끝에서 다른 끝을 연결한 길로 두 나라는 연결되고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세계를 만나며 감탄과 자각을 하게 됩니다. 체 게바라는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이 길을 달렸습니다. 그는 ‘루타 40’ 안에 존재하는 여러 세상을 만났고 자신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길이 아니었으면 평생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을 다른 세상을 ‘루타 40’은 그에게 연결해준 것입니다.
18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달리는 버스, 그 길은 멘도사에서 바릴로체까지 이어진 ‘루타 40’의 중간 구간입니다. 안데스의 산자락이자, 황량하지만 평온한 팜파(Pampa)로 이어지는 길이며 색다른 세상을 연결해주는 도로입니다. 2층 앞자리를 원했건만 나만 원했던 자리가 아니어서 3개밖에 없는 앞자리는 몽땅 연인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아쉬움 반 애석함 반으로 뒷자리에 앉았지만, 다행히도 조망이 뒤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층 버스의 장점이죠.. 아르헨티나의 장거리 버스는 2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반으로 나누어 짐칸을 만들어서 아홉 자리밖에 없습니다. 거의 침대같이 눕혀지는 의자이고 1층이라 흔들림이 없어 장거리 여행에 안락한 자리입니다.
반면 2층은 한 줄에 의자가 2개고 10줄 이상 되니 40여 자리가 있는 초대형버스입니다. 차가 달리며 잠에 빠져들었나 봅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져 눈을 뜨니 차장이 와인을 따라줍니다. 와인과 음료수, 차, 그리고 저녁이 제공되는 시간입니다. 와인을 석 잔 마시고 다시 눈을 감으니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잠은 머뭇거리지 않고 아침까지 쉬지 않습니다.
들판에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햇빛이 퍼져나가는 이른 아침, 끝도 없이 펼쳐진 팜파를 달립니다. 창 너머 메마르고 황량한 대지가 끝도 없어서, 바라보는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땅에 불행한 사생아로 태어난 여성, 그러나 자신의 꿈을 찾아 세상과 마주 서야 했고 세상이 무어라 하든 꼿꼿이 서고야 만 당찬 여성 ‘에바 페론(Eva Peron)’은 지금 달리고 있는 팜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후아나는 인근의 작은 목장주의 정부였습니다. 부부 사이에는 5명의 아이가 있었고 에바는 그중 4번째 아이였습니다. 목장주는 자신의 자식임에도 후아나가 낳은 5명의 아이를 법적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 에바는 사생아로 살아야 했습니다. 팜파에서의 생활은 변화가 없고 지루한 일상이었지만 에바는 하루하루를 낡은 잡지들 속 여배우의 모습으로 피어난 자신을 꿈꾸며 보냅니다.
15살이 된 에바에게 팜파는 더 이상 넓은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한 삶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로 가출을 결행합니다. 고결한 분의 가출은 출가고 범인의 가출은 가출이라 하니 에바에게도 출가라는 말이 옳을 듯합니다.
뜻을 두고 높은 차원에 삶을 이루려고 자기 수련을 위해 떠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오기는 하였지만, 배경도 학력도 재산도 없는 그녀에게 성공은 너무도 먼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시작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마다치 않았으며, 천천히 꿈을 향해 걸어갔고 마침내 꿈을 이루게 될 동반자를 만나게 됩니다.
1943년 후안 페론(Juan Peron)을 중심으로 한 통일 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페론은 부통령 겸 노동복지부장관직을 겸임하며 정권의 실세로 활동합니다. 그가 전시내각의 노동부 장관으로 활동하던 1944년 운명의 도화선은 멘도사에서 멀지 않은 안데스 자락의 풍요로운 도시 산후안에서 일어납니다.
6,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낸 강력한 지진이 산후안(San Juan)을 덮쳐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행사를 열게 됩니다. 그리고 에바가 연예인으로 자선행사에 참가하면서 둘은 운명 같은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에바는 그날을 회상하며 “멋진 하루였다.” 고 말했다고 하니 둘은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었나 봅니다.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동거에 들어갑니다. 아마 첫 부인을 잃고 외로웠을 페론은 젊고 아름다운 에바에게 정신 못 차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페론과 에바가 운명적 만남을 가졌을 그 시점은 페론이 주요산업의 국유화, 외국자본의 축출, 노동자 위주의 사회정책 등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정책을 실행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페론 곁에 선 에바는 사랑스럽고 여린 여자로 비추어졌습니다. 하지만 에바는 바닥부터 시작해 몸 하나로 정상에 오른 강인하고 주관이 강한 여성입니다.
단지 실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죠.. 중국엔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재능이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이 비록 지금은 숨겨져 있어도 때가 되면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재능을 발휘할 시간은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옵니다. 페론의 급진적 정책은 군부 내 보수파의 저항을 받았고 반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며 페론이 ‘데스카미사도스(Descamisados)’라는 섬에 구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바는 자신의 아름다움 미모와 감성을 자극하는 배우다운 연기력으로 대중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페론을 위해 연설을 합니다. 팜파의 사생아로 태어나 몸 하나로 한 계단씩 꿈을 향해 걸어간 그녀의 삶에 노동자들은 울먹이기 시작했고 대중은 그녀를 연인으로 가슴에 품기 시작했습니다. 에바는 삼류 배우에서 온 국민을 감동시키는 특급배우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로써 팜파를 달리며 끝도 없이 외쳤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에바의 호소에 동조하며 그들은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고 거리로 뛰쳐나와 페론을 외쳤습니다. 그 결과 페론은 10일 만에 풀려나 에바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페론은 석방 이후 에바와 결혼을 하고 다음 해 추종자들과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그리고 29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녀의 삶은 소설같이 언제나 극적이었고 절절했습니다. 그녀가 연기한 인생 드라마의 절정은 그녀의 사망입니다. 그녀는 영부인이 되었고 영향력 있는 대중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삶에서 정점에 올라선 것입니다. 하지만 향유하며 천천히 내려올 운까지는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에바의 나이 34살, 그녀는 척수 백혈병에 자궁암까지 겹쳐 사망에 이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몸 하나로 세상을 헤쳐 왔던 그녀는 대중의 사랑을 갈구했고, 사랑을 정복했을 때 운명을 다 한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기를 잊지 않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시신은 유언대로 썩지 않게 처리하여 노동부 건물에 안치되었습니다.
에바와 함께 이루어간 페론주의는 그녀가 죽음으로서 위기를 맞습니다. 에바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안 페론은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잃었고 결국 국외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녀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페론은 정권을 유지했을까요?
에바가 살아 있었다면 국민은 다시금 그녀를 위해 쿠데타에 맞서 저항했을까요? 하지만 에바는 죽었고 국민은 경제적 고충을 겪고 있었습니다. 페론은 에바를 그리워하고 그녀가 없는 상황을 한탄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페론이 선택했던 것은 노동자를 위한 독재였고, 국민과 노동자를 위한 독재도 결국은 독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재는 성과가 나지 않는 순간 모든 책임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더 강한 독재를 해야 하니 결국은 종말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겁니다. 페론의 정책으로 많은 혜택이 자본가에서 노동자에게 돌아갔지만, 역설적이게도 파업권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페론은 노동자와 대중을 위한다는 핑계로 독재를 했지만, 결과는 독재만 남았고 정책이 힘을 잃었을 때 노동자는 같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적 시스템인데 반해 사회주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사회주의는 욕망을 무시한 채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은 여전히 욕망을 갖고 있다.]
그녀가 오래 살았다면 그녀에 대한 환상이 깨져 많은 후일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에바는 꿈을 이루었고 그 꿈을 지키기 위해 반대파를 핍박했으며 권력유지를 위해 독재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답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두가 사랑할 때 대중의 연인으로 숨을 거두었으니까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그렇게 그녀는 아르헨티나를 두고 떠났고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엔 오늘도 유령같이 그녀의 잔영이 떠다닙니다.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그녀의 시신을 두고 벌인 정치권의 싸움에서도 나타납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그녀가 가져올 파장을 두려워해서 에바의 시신을 몰래 이탈리아로 숨깁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중들은 그녀의 시신을 남편에게 돌려주라고 군사정권에 압력을 가했고 그녀는 마드리드에 망명 중인 페론의 품에 돌아가게 됩니다. 시신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건 그만큼 그녀가 폭발력 있는 존재이며 아르헨티나가 어둡고 긴 터널을 걷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에바는 언제나처럼 페론에게 구원자입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선으로 이양되며 재개된 자유선거에서 페론은 죽은 에바를 앞세워 그의 인생에서 3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페론은 새로 얻은 부인인 ‘이사벨 페론(Isabel Peron)’을 부통령에 앉히고 지지세력을 모아 페론주의를 부활하려 했지만 10개월도 안 되어 사망하였고, 이것으로 에바와 페론의 러브스토리는 끝을 맺습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으나 곧 이은 쿠데타로 이사벨 정권은 문을 닫고 긴 군부독재의 시대에 들어섭니다. 이사벨 페론은 에바의 시신을 대통령관저로 옮겨오고 극진히 모셨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에바의 덕을 보려 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에바의 사랑은 페론에서 끝났고 국민도 냉정했나 봅니다. 대통령 자리에 얼마 머무르지 못한 걸 보면요… 이사벨 정권을 쓰러뜨리고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에바를 레콜레타 공동묘지(Cementerios Recoleta)의 가족묘역으로 옮기도록 허락해서 현재는 공동묘지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다.
사후 24년 만에 대중의 연인에서 가족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의 가족묘역엔 누가 같이 잠들어 있을까요… 에바는 아버지를 가족묘역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을까요…
페론의 정책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어 아르헨티나에 갈등의 원인처럼 비춰졌을까요… 사이토 다카시의 말처럼 욕망을 무시한 채 이론적으로 이상적인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걸 운영해보려고 강력한 독재를 추구함으로써 생겨난 문제일까요? 그렇다면 왜 페론은 국가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에 매달려야만 했는지 궁금합니다.
카스트로와 아옌데도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정책을 펼쳤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물론 미국이라는 배후가 있었고 단순하기만 한 대중이 중심에 있었으며 영리하고 여유로운 보수층이 뒷짐을 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의 원인을 밖으로 돌린다면 그것은 ‘되면 내 탓 안되면 남 탓’이니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페론주의는 “왜 경제 강국 아르헨티나는 추락했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은 아니라도 폐허가 된 유럽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내리막길에 들어섭니다. 왜일까요…
소련이 강대국이 된 것은 사회주의 소련의 공업화 정책 때문입니다. 아마 농업에 기반을 둔 차르 체제(절대왕정체제)가 지속되었다면 러시아는 강국이 되지 못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막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영국이 스페인을 세계의 바다에서 몰아낸 것 역시 공업화의 결실입니다.
스페인이 1차 산업에 매달릴 때 영국은 공업혁명을 이룩했고 그 생산력으로 스페인을 무너뜨렸습니다. 미국의 성장은 농업중심의 남부와 공업중심의 북부가 대립한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했고 그때부터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남부로부터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병력으로는 26배, 화력으로는 10배가 넘는 물량공세를 하고도 영국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건 공업력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공업혁명을 이룬 국가는 외부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외세에 의존한 공업혁신은 원래부터 없는 것이며 혁신은 내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페론이 정권을 잡은 1946년 아르헨티나는 공업화의 길에 있었고 도시는 모여드는 노동자로 거대한 슬럼가를 형성해 갔습니다. 농업과 축산 중심의 산업에서 공업중심으로 산업을 바꾸어 가려면 도시의 구매력을 키워야만 했고 도시의 구매력을 키우려면 든든한 중산층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건 시대의 요청이고 아르헨티나가 나아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페론은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매년 임금의 20% 상승을 약속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복지정책을 내놓습니다. 페론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외국인 소유의 철도, 전화 사업을 국유화하고, 수출용 곡물을 독점적으로 구매하는 회사인 IAPI를 설립하여 높은 금액으로 곡물을 해외에 팔아 그 재원을 마련하는 정부주도형 산업정책을 씁니다.
페론은 정책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강력한 독재정책을 쓰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보는 듯합니다.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인 가스프롬(Gazprom)은 GDP의 10%, 정부예산수입의 20%를 차지할 만큼 국가산업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페론의 IAPI도 비슷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대통령직을 연임하고 한 템포 쉬었다가 3번 대통령에 당선된 이력까지 비슷합니다.
독재와 권력집중은 효율적일지 몰라도 위기에 독화살이 되어 돌아옵니다.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페론을 파시스트(국가지상주의)로 몰아세우며 아르헨티나가 곡물을 수입하지 못하도록 정치적 압력을 넣었고 유럽이 이에 동조하면서 성장하던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1949~1952년 무역적자를 기록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합니다.
곡물과 축산물 수출이 막히면서 아르헨티나는 돈 들어갈 구멍을 어느 정도 조절해야 할 시점에 이릅니다. 그러나 한번 빵 맛을 본 노동자는 양보하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니 페론은 결국 통화발행으로 부족한 재원을 만들어냅니다. 무분별한 통화발행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죠…
무분별한 통화발행으로 자국 통화를 포기한 본보기로 짐바브웨(Zimbabwe)가 있습니다. 미화 $1가 짐바브웨 3조$에 다다랐으니 돈을 거저 주어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아르헨티나도 1,000포인트가 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됩니다.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이 페론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임금이 지나치게 낮고 산업화의 결실을 일부 자본가와 외국 투자자가 가져간다면, 국내에 투여되는 자본 양이 적어 발전이 정체되어 있다면, 그의 정책을 포퓰리즘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수치상으로 봐도 페론주의가 도입된 초기 1946년~1948년 동안 아르헨티나 경제는 약 25% 성장했습니다. 즉 분배와 급여인상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페론의 분배정책은 극빈층 국민의 60%가 국가소득의 33%를 분배받을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고, 다분히 파괴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소득층의 소득증대는 곧 두꺼운 중산층의 형성을 가져오고 이는 두꺼운 소비층을 형성에 공업발달과 연계되므로 그의 분배정책을 선순환적 구조로 다시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아옌데와 같이 페론도 자기에게 주어지 시간을 채우지 못해서 정책의 결과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미국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운명을 좌우하는 불행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옌데와 페론을 몰아낸 군부독재는 외자에 의존한 공업화 정책으로 경제구조의 왜곡을 가져왔습니다. 무엇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외국에서 돈이 들어오면 당장은 좋은데 앞으로 어떨지 모르겠고 스스로 돈을 불려 나가니 힘이 들고…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버스는 밤새 달려 다음 날 점심때가 지나 바릴로체 버스터미널에 저를 내려놓습니다. 안데스 산맥 등성이에 포근히 자리 잡은 도시입니다. 설산이 있고 호수가 있어서 남미의 알프스로 불립니다. 도시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니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산이라면 호수 건너 안데스 산줄기 일 텐데, 저기에 사는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저 산을 넘어다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회 성직자인 ‘디에고 데 로살레스(Diego de Rosales)’는 건너편 칠레에서 안데스를 넘어와 나우엘 우아피 호수((Nahuel Huapi L.)를 발견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바릴로체에서 버스와 페리를 타고 안데스를 넘고 호수를 건너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로 가는 여행객이 많습니다. 호수와 설산뿐 아니라 안데스 허리춤에 멋진 대지의 선물도 있으니 안데스를 넘는 네 번의 여행구간 중 알티플라노 ~ 아타카마 구간 다음으로 멋진 경관입니다.
바릴로체에서 첫 번째로 선택한 여행은 쎄로 로페즈 산(Cerno Lopez)을 오르는 트레킹입니다. 여행사는 가이드, 차량, 점심 도시락을 포함에 $80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루 산행으로 적당한 금액이어서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버스에서 내려 가파른 숲길을 오르는데, 화산재가 굳어진 대지인지 날리는 먼지로 인해 뒷사람과 한참 거리를 두어도 먼지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1시간을 오르고 나니 작은 산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산장까지 잘 닦인 비포장도로를 뛰어 올라온 부부가 보입니다. 이게 무슨.. 비포장 길을 걸어오면 될걸 $80이나 줘가면서.. 산장엔 젊은 부부가 가벼운 스낵과 차를 파는데, 장식은 역시 가우초(Gaucho)의 마구들로 가득합니다. 자신의 역사를 갖지 못한 아르헨티나의 한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때 기병대’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즐겨보며 인디언이 쓰러질 때마다 손뼉을 치고 미국 기병대가 총 맞아 쓰러지면 애달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병대를 이끌던 카스터 장군(Custer)은 영웅이었지만 실상 그는 북미의 인디언들을 가장 많이 몰살한 장군이었습니다.
어떤 명분이든 살인자에게 환호를 보낸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에도 그런 분이 있는데, 로카장군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1870년 팜파에 소수로 퍼져 사는 원주민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흔히 아메리카에서 원주민 학살을 진공청소기에 비유하는데, 아즈텍, 잉카 제국의 중심부는 덜 하지만 인구가 적은 변방은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원주민을 제거하고 자기들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었는데, 그런 나라 중 하나가 아르헨티나입니다. 그런 자신들의 한계 때문일까요, 장식은 한결같이 마구간입니다. 어떻게 마구간이 자랑스러운 문명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요…
호수를 내려다보는 전망은 매우 아름답고 산장에서 파는 수제 맥주는 일품입니다. 마을마다 수제로 만든 맥주에 라벨을 달리해서 판다는 데, 감미료를 넣지 않은 담백함이 아주 좋습니다.
다시 1시간 반을 걸으면 두 번째 산장이 나오고 여기서 다시 1~2시간을 걸으면 로페즈 정상에 이르게 됩니다. 로페즈 정상은 단단한 암질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남성적인 산입니다.
알프스의 봉우리가 그렇듯 산꼭대기와 산장과의 거리는 고작 1~2시간이지만 바람이나 온도는 전혀 다른 공간입니다. 안데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2,000m 위의 세상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꾸어 놓는 모양입니다. 호텔로 돌아가며 오가는 버스번호를 눈여겨 봅니다. 다음에 오게 되면 서양인들 같이 버스를 타고 와야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올 수 있을런지요…
바릴로체에서의 이틀째는 나우엘 우아피 호수탐방입니다. 많은 식물이 지구 상에서 유일하게 이 섬에서만 자란다고 하니 솔깃합니다. 어차피 여행이란 게 생소한 자극을 찾아가는 일이니만큼 이 섬을 찾아가 볼 가치는 매우 높습니다.
부두에서 쾌속선을 타고 40분을 달려 나무숲으로 유명한 섬에 내려놓습니다. 제가 찾아온 나무가 바로 아라야네스(Arrayanes) 나무입니다. 나무숲 속으로 나무발판이 이어지고 한 바퀴 돌아보니 15분 정도 걸립니다.
무엇이 대단한 건가요… 겉이 좀 붉고 엉성한 나무가 여기서 밖에 안 자란다니… 나무의 형태나 생김새를 보면 외피가 비닐같이 매끈한 게 오래전 호수에 잠겨 생식하던 해초가 물이 빠져서 나무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마음이 얼굴에 나온다니 항상 조심하려 하지만 잘되지 않았나 봅니다. 지루해하는 저를 살피던 페데리코는 “흥이 안 나느냐?” 고 묻더니 내일을 기대하라고 어릅니다. 인생도 여행도 내일이 있죠… 그러니 실망은 어리석은 일인가 봅니다. 오늘은 내일로 가는 과정이니까요.
나우엘 우아피 호수는 맑고 청결한 호수입니다. 이 호수의 끝은 칠레와의 국경이고 안데스의 건장한 설봉들이 호수를 만들어 냈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호수를 어떻게 즐길까요… 그들의 행로에 동참하니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브라질, 칠레, 미국, 호주, 프랑스, 아르헨티나 사람이 같은 요트에 올랐습니다. 요트에 마주앉은 사람들은 요트가 출발하기도 전에 어디서 온 누구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루 동안 가족이 되는 여행이라 소개가 우선인 듯 싶습니다. 실내로 들어가면 탁자에 와인과 음료, 과일 바구니, 접시에 곱게 썰려있는 치즈와 비스킷, 롤 케이크 등 먹을거리가 가득합니다.
이 배를 타고 호수가 외진 곳에 정박해 놓고 먹고 마시고 물에서 풍덩거리다 낮잠 자고 그렇게 왁자지껄 하루를 노는 여행입니다. 그것 말고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원시림을 3시간 걷는 사이드 트렉이 있다고 합니다. 나우엘 우아피는 아르헨티나에서 최고의 호수공원입니다.
호수는 바다와 달리 잔잔해서 바라보는 사람도 마음이 잔잔해집니다. 배에서 내려 숲길을 걸으면 잔잔하고 고결한 나우엘 우아피 호수의 숨결을 느끼게 됩니다. 호수에 흘러드는 지류를 밟아 숲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면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폭포가 막아섭니다. 저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호수를 흘러듭니다. 그리곤 어디론가 다음 행로를 이어가겠죠..
꽉 막힌 호수에서도 물은 갈 길을 찾아 나갑니다. 참 자연의 이치는 사소한 곳에서도 인간사를 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활이 막힌 절벽 앞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행을 생각하곤 합니다. 지금도 벽에 서 있죠.. 물이 되어야겠습니다. 벽을 넘을 게 아니라 돌아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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