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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아있는 화석

파타고니아의 또 다른 요정을 찾아 칠레 국경을 넘어 파이네로 갑니다. 광활한 들판에 덜렁 집 한 채 지어놓고 국경 검문소라 하고 세관이라고도 합니다. 한 나라가 지배했으면 편했으련만 파타고니아는 하나인데 나라는 두 개입니다.

 

국경을 넘어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다가가는 길은 침묵의 땅에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듯합니다. 고갯마루를 오르면 호수가 나오고 멀찍이 가물가물하던 산은 점차 육안에 틀이 잡혀갑니다.

 

그렇게 고요가 지배하는 파타고니아 들판을 몇 시간이고 달려 국립공원 입구에 틀고 앉은 숙소에 닿습니다. 또로 호수(Lago el Toro)를 사이에 두고 파이네 침봉과 마주하는 파이네 호텔은 그 밤 지상에서 가장 편안한 집 같습니다.

 

파타고니아의 푸석한 대지가 토해내 만든 물웅덩이들… 파타고니아의 대지는 그렇게 찌걱찌걱한 표면을 호수에 닮아 요물조물 닦아내는 모양입니다. 펼쳐진 대지가 전부 호수이기도 하고 호수를 품은 대지 같기도 한 파이네의 밤은 불그락 검무룩 짙어갑니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그 밤을 향해 노래 불렀던 저도 불그락 검무룩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파이네와 가장 멋지게 교감하는 위치여서 눕지 못하고 보낸 밤이었습니다.

 

전망이 좋은 파이네 호텔과 벤치

 

파이네 트레킹은 ‘W자’로 알려진 트레킹이 고전입니다. W트레킹은 파이네의 정수리에 해당되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를 왕복하고, 센트럴(Central) 산장에서 시작하여 노르덴스퀼드(Nordenskjold) 호수를 따라 꾸에르노(Cuerno) 산장에서 1박을 하고 그란데(Grande) 산장까지 이어지는 3일간의 트레킹으로 토레스 델 파이네와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등 파이네를 구성하는 두 개의 암봉군을 W자로 연결하는 트레일을 따라 요리조리 둘러보는 트레킹입니다.

 

파타고니아의 계절은 11월부터 4월로 알려져 있는데, 11~12월은 봄, 1~2월은 여름, 3~4월은 가을에 해당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청명한 가을과 만물이 소생하는 봄 계절의 꽃이자 여왕이라 말합니다. 파타고니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러니 파타고니아도 방문을 여름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봄에는 야생화가 만발하고 가을엔 바람이 잔잔하다고 하니 여름의 파타고니아의 불안정한 기후와 바람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파이네 트레킹 첫날 센트럴 산장에 방을 잡고 3개의 암봉이 반듯하게 솟구쳐 오른 토레스 델 파이네로 트레킹을 떠납니다. 왕복 24km 정도 되는 거리여서 좀 멀다 생각되지만 길이 평이해서 하루 산행으로 적당합니다. 계곡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칠레노 산장으로 가는 길은 노출된 경사면을 올라 고갯마루에 이르면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갯마루를 넘어야 합니다.

 

등산 가이드인 산티아고는 바람이 불편하니 바닥에 주저앉으라고 하네요… 그렇지 않으면 날아갈 수 있다고 겁을 주는데, 바람의 대지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오르막길을 40분 걸어올라 고갯마루 턱에 오르니 바람이 중심을 잡지 못할 만큼 거세게 불어옵니다.

 

저 멀리 계곡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 바람의 진원지는 암봉인 ‘토레스 델 파이네’일 겁니다. 고갯마루를 넘어 계곡 안으로 들어서면 바람은 오간 데 없이 잔잔합니다. 

 

칠레노 산장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숲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2시간을 걷고 나니 표면이 드러난 거친 사면 길이 앞을 막습니다. 여기가 토레스 델 파이네의 전망대인 미라도르 라스 토레스(Mirador Las Torres)로 오르는 오르막입니다. 심연의 울림은 근원이 있듯이 고갯마루 턱을 넘으니 차가운 빙하호수와 묵직한 3개의 암봉이 맞이하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바로 바람의 근원이며 울림의 근원이고 제가 힘들여 찾아온 근원입니다.

 

너머에 보이는 꾸에르노스 델 파이네(파이네의 뿔들)

 

파이네 산괴는 1,200만 년 전에 형성된 화강암 산맥의 자락입니다. 1,200만 년 전은 신생대 제3기(6,300만 년 전부터 200만 년 전)에 해당되며 이때는 조산운동이 활발하여 없던 산맥이 만들어지며 대지의 틀이 완성되었고, 생명체로는 포유류가 지구의 주인 자리를 꿰어찬 시기입니다.

 

한마디로 현재의 지구 모습을 완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아주 순도 높은 화강 암봉인데요, 순도 높은 화강 암봉은 바닷속에서 순수한 진흙이 쌓여야만 만들어집니다.

 

물고기나 수상식물이 많이 섞여 있을수록 암질의 순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주변이 다 깎기고 씻기도록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세 암봉은 말 그대로 순도 높은 물질입니다.

 

바닷속에선 매일매일 엄청난 생명체가 탄생하고 사라집니다. 명을 다한 생명체는 바닥으로 내려앉는데, 이를 불순물로 본다면 세 봉우리 위로는 몇 만년동안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산티아고는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하면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너스레는 떱니다. 순도 높은 암봉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이 분명 농축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센트럴 산장은 6인실에서 12인실까지 도미토리식 다인실입니다. 하지만 식당과 휴게실은 산장이 아닌 호텔 수준이고 더운물 샤워도 가능합니다. 그래도 슬리퍼와 타울, 비누를 챙겨가야 합니다… 파이네 W 트레킹의 불편한 점은 개인 짐을 모두 메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식사가 제공되고 담요나 침낭을 대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 의류만 가져가면 되지만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 비옷, 방풍복 등 이것저것 챙기다 보면 배낭이 묵직해집니다.

 

파이네의 둘째 날은 노르덴스퀼드 호수를 따라 걷습니다. 호숫가로 걷기 시작하다 숲길로 들어서면 호수는 멀어지지만, 들판의 야생화가 반기고 바람이 등을 떠밀어 걸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그런데 나무들이 까맣게 때를 입었습니다. 때가 덕지덕지 한 나무는 나뭇잎 하나 없고 앙상한 나무만 즐비합니다.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큰 해를 입은 것이어서 산티아고에게 물었습니다. 산티아고의 설명에 의하면 젊은 여행자가 야영하다 불을 내 모두 탔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오래전에 한번 그랬고 몇 년 전에 다시 한 번 불이 낫다고 합니다.

 

갑자기 화가 나서 그 여행자는 어찌 되었냐고 물었더니 우리 돈 1,000만 원 정도 벌금을 물렸다고 합니다. 아마 그 젊은 여행자도 빈털터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집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호되게 야단맞았을 겁니다.

 

야영하는 사람은 야영하며 발생하는 휴지를 모두 가져가야 하는데, 젊은 여행자는 수거하는 불편을 덜려고 쓰레기를 불법으로 소각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국립공원에서 야영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파이네도 국립공원 내에서 야영을 허용 안 하면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젊은 여행자의 입장은 좀 다릅니다. 파이네 산장을 예약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고 이에 더해 산장비가 젊은이들이 이용하기엔 제법 비쌉니다.


하루에 1인 15만원 정도 하니 둘이 방 하나 쓰다고 하면 30만원이나 되니 웬만한 초특급호텔 숙박료입니다. 그러니 젊은 여행객은 텐트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기회의 공평성을 확대하면 어떨까요. 일정 비율은 젊은 여행자를 위해 남겨두고 숙박료는 일반인 10% 정도로 책정한다면 알맞은 대안이 되지 않을까요? 현재는 어른이 책임지고 미래는 너희가 우리를 보살피라는 협약은 사회의 근간 시스템입니다. 젊은 세대에 충분한 혜택을 주지 않으면서 미래를 책임지라는 건 계약을 깨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파이네 산장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 트레커들에게 산장을 어떻게 개방할지…

 

W트레킹 셋째 날은 두 시간 걸은 후에 사이드 트랙을 선택합니다.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계곡을 쫓아 브리따니코(Britanico)캠핑장까지 갔다 옵니다. 브리따니코 캠핑장까지는 시원한 물줄기 옆으로 난 퇴석 지대를 따라 1시간 30분 정도를 올라가게 됩니다. 여기서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최고봉은 파이네 그란데지만 특이한 봉우리는 정상에 검은 띠로 둘러친 쿠에르노 데 파이네입니다. 파이네의 뿔로 불리는 이 봉우리는 온화한 소의 수줍은 뿔같이 각도나 형세가 평화롭습니다. 특이한 점은 정상을 덮은 검은 점토판인데, 이로 인해 암봉의 흰 단면이 더욱 돋보이고 화려하게 보입니다.

 

정상 점판암은 아직 화강석이 되지 못한 시점에 그만 떠밀려 융기한 지질학적 역사를 증거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1,000만 년은 되었겠죠… 멀리 보이는 빙하호수는 짙다 못해 굳어진 듯 보입니다. 얼마나 무기물이 농축되었으면 저리도 굳어져 있을까요…

 

그런 호수를 보며 배낭을 감춰둔 지점으로 내려와 그란데 산장까지 가던 길을 이어갑니다. 그 길은 호수를 끼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건너뛰듯 조밀하게 이어지고 오르막 끝에 이르러 너른 바위에 걸터앉으면 쉬어감이 아쉽지 않은 전망에 빠져듭니다.

 

호수와 암봉 그사이에 정체되어 있는 자신, 자연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요…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로 분해되면 나와 저 바위 그리고 짙푸른 호수는 비율과 분포 차이를 보일 뿐 구성물질이 같을 것입니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면 호수나 암봉을 구성하는 작은 물질이 될 테고 암봉과 호수에서 나온 물질은 나라는 존재를 만드는 데 보태지 않을까요…

 

자연속의 그란데 산장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에프라임 러브록(James Ephraim Lovelock)은 1978년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저서를 통해 가이아 이론(Gaia Theory)주장합니다. ‘가이아’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지구를 뜻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가이아 이론의 내용은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 대기권, 대양, 심지어 토양까지 지구를 구성하는 하나의 범지구적 실체이기 때문에 존속에 필요한 최적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스스로 변화한다.”

 

다시 말해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생명체이고 지구는 이런 존재들에 의해 조절되는 하나의 유기체입니다. 그러니 지구를 너무 괴롭히면 지구는 자기 조정을 해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거라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개발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환경을 보호하고 자연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인류를 구제하는 것이니 더 열심이어야 합니다.

 

지구도 살아있는 생명체이고 모든 사물에는 혼령이 있으니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오래도록 간직한 공생의식입니다. 그런데 과학은 공생보다는 극복에 방점을 찍으니 극복되는 만큼 관계의 끈은 얇아집니다.

 

불을 낸 젊은 여행자는 불이 가져온 결과에 주목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정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무를 자르고 불을 지피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면서 회상에 젖는 감상적인 모습 이면에는 공생이라는 관계가 무너져 내립니다.

 

티벳에서는 건축을 하기 전에 고통을 입을 땅에 제사를 드리고 작은 생명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사소한 일에 며칠을 보내고서야 첫 삽을 뜬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이 소모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건 미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주유하기를 즐기셨고 제자들은 그분 뒤를 걸으며 명상하곤 했습니다. 이를 시기하던 요기(힌두 수련자)들은 부처님을 비난합니다. “벌레와 새들도 둥지와 굴이 있어 머물거늘 석가 제자들은 언제나 세간으로 떠다니다가 초목을 밟아 죽이고 남의 목숨을 끊는가?”

 

부처님은 이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대각(큰 깨우침)을 얻었음에도 겸허히 비난을 받아들입니다. 길을 걷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생명체를 밟을 수 있기 때문에 부처는 만물이 소생하는 우기 3개월은 주유를 멈추고 동굴안거를 시작합니다.

 

사찰은 이렇게 나의 생명이 아닌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부처는 미물과도 공유해야 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관계가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산에 불을 낸 젊은 여행자,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의 만족을 추구하는 여행자, 적은 돈을 건넸을 뿐인데, 자연의 소유자가 되려는 여행자. 나는 지금 어느 모습인가요…

 

라스 토레스 전망대의 화강암봉

 

그란데(Grande) 산장은 센트럴이나 꾸에르노 산장과 같이 다인실만 있는 게 아니고 2층엔 아늑한 2인실이 있습니다. 방은 이층 침대가 겨울 들어갈 만큼 좁지만, 휴게실은 운치 있고 공간이 여유롭습니다.

 

산장에서는 뷔페식으로 아침, 저녁뿐 아니라 점심도 제공되는데, 그레이 빙하(Grey Glacier) 전망대를 갔다 오려 하니 도시락을 주문할까 돌아와서 뷔페 점심을 할까 고민합니다. 트레킹 내내 런치백을 배낭에 넣어가지고 다녔는데, 바게트 샌드위치는 반도 먹기 어려울 만치 크고, 사과, 초콜릿, 땅콩, 생수까지 종이 봉지에 하나 가득 주지만 3일간 먹고 나니 질립니다.

 

런치팩이 싫어 아침부터 서둘러 전망대로 향합니다. 왕복 22km, 오르막이 거의 없는 평지기 때문에 점심시간까지 주어진 6시간 안에 충분히 갔다가 올만 합니다.

 

그레이 빙하로 가는 길은 파이네 일주 트레일의 한 구간입니다. 파이네 침봉군 전면을 도는 트레일이 W트레킹이라면 암봉군 뒷면을 연결해 트레일이 일주 트레킹입니다. 약 7~8일 정도 소요됩니다.

 

일주 트레킹은 사람들이 그란데 산장을 지나면 그레이(Grey) 산장에서 마지막 숙박을 하고 그 후로는 센트럴 산장에 닿기까지 이틀간 산장이 없어 야영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한 번의 일주 트레킹을 하고, 뒤이어 W 트레킹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연령대에 맞는 트레킹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단체로 오는 경우엔 센트럴에서 말을 빌릴 수 있으니 개인 짐을 큰 카고백에 넣어 옮기면 트레킹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외, 체력이 부족한 분들은 첫날 토레스 델 파이네를 왕복하고 둘째 날은 그란데 산장으로 셔틀버스와 배를 타고 이동한 후 가볍게 파이네 그란데 전망 포인트를 다녀오고 셋째 날 그레이 빙하 전망대를 다녀오는 방안이 부드럽고 편안하기 때문에 권할 만합니다.

 

그란데 산장에서 하루에 2~3편 있는 배를 타고 페오에 호수(Lago Peohe)를 건너 나오면 파이네 트레킹은 끝이 납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며 다시금 파이네를 가슴 깊이 새겨둡니다. 파타고니아에는 세 명의 요정이 있습니다.

 

모두 만나보고 세 요정을 평한다면 저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피츠로이와 세로토레가 살아있는 요정이라면 파이네는 화석이 된 요정이랄까요…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목숨 걸고 매달리는 피츠로이와 세로토레와 달리 파이네는 멀리서 바라보고 즐기는 암봉이기 때문인가요… 그보다는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가까이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파이네 트레킹의 끝, 페오에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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