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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마젤란 해협 건너 대륙의 끝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는 작은 해양도시입니다. 도시라기보다 포구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크기입니다. 하지만 한때는 번영과 영광스런 항구도시였습니다. 유럽을 출발해 태평양을 건너려는 상선은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대서양에서 벗어나고 태평양에 들어섭니다.

 

대서양을 건넌 상선은 태평양을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필요한 물자를 채우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그런 중계항구로 푼타아레나스는 최적의 위치였습니다. 파나마 운하(The Panama Canal) 만들어지기 전 푼타아레나스는 장기 항해를 앞둔 뱃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쉼터였습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가 열리면서 상선은 더 이상 푼타아레나스를 찾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노년의 삶을 사는 듯 쓸쓸히 저물어가는 작은 포구로 전락합니다. 고래를 잡는 어선들이 간혹 들락거리던 작고 쓸쓸한 포구는 그러나 새로운 전기를 맞을 듯합니다. 영원히 얼음에 덮여있을 줄 알았던 남극대륙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극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하여 한국식당을 찾습니다. 작은 상가 2층에 자리 잡은 분식점엔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과 김밥을 파는 작은 분식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뚝뚝한 주인아저씨는 문 닫을 시간이라고 음식주기를 거부합니다.

 

참 야박한 인정이네 하며 되돌아서려니 서운함과 아쉬움이 교차합니다.그런데 식당주인 아저씨의 삶의 자세가 우리와 다른 게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멀리 대륙의 끝머리에 자리 잡은 그 양반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나누는 것 같습니다. 문 닫다가도 손님 들어오면 문 닫기를 유예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죠.

 

식당 주인은 돈 보다 삶을 위해 그 멀리에 정착한 게 아닌지요. 가족에게 돌아갈 시간에 가족 곁에 있어야 한다는…

 

해양도시 푼타아레나스

 

호텔로 돌아와 해산물 식당을 문의합니다. 호텔 주인이 추천해주는 식당을 찾아가니 음식값이 꽤나 비쌉니다. 대구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에 저녁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와 중심가를 걷다 보니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동상이 무언가를 찾는 어린애같이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Portugal) 동인도회사의 선장으로 인도의 고아에서 7년간 거주하며 인도양 주변의 여러 지역과 향료무역을 하게 됩니다. 그때 그는 향료에 대한 여러 정보를 갖게 되었겠죠… 마젤란은 포르투갈로 돌아와 봉급인상과 원양항해를 청원하였으나 밀무역에 관계된 것으로 오해받아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포르투갈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마젤란은 스페인 카탈루냐(Catalunya) 지방으로 향합니다. 스페인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I)에게 대서양을 건너 향료의 땅인 인도와 향료의 제도로 불리는 말루쿠 제도(Maluku Is 인도네시아 순다열도와 뉴기니아 사이의 열도)로 항해하겠다고 청원합니다.

 

후추는 육류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주고 부패를 막는 향료로 냉장고가 없던 중세 유럽인을 사로잡은 향료입니다. 그 생산지가 인도이니 인도를 사랑하는 유럽의 마음은 역사가 깊습니다.

 

후추가 유럽인의 마음을 빼앗은 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마는 의약품으로 쓰이던 후추를 음식에 넣어 먹기 시작했고 맛의 세계를 열어준 후추에 열광합니다.

 

얼마나 후추에 열광했으면 폴리비오스(Polybios)는 저자 플리니우스(Plinius)의 [박물지]에서 “아주 적게 잡아도 인도, 중국, 아랍이 우리 제국으로부터 빼가는 돈이 1년에 1억 세스테리우스(로마 화폐의 동화)이다” 라고 퇴폐한 사회 풍조를 비판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국은 비단일 테고요, 인도는 후추일 텐데 이 모든 물건을 아랍이 중계하며 이익을 취했으니 그의 비통함이 극에 달한듯합니다.

 

그렇게 음식에 정착한 후추는 로마가 멸망하고도 그 확산이 멈추지 않아 유럽 전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습니다.

 

육두구(肉頭寇)는 이에 비하면 역사가 짧습니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끝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진출하면서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에서 육두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독점적으로 유통시키며 유럽에 공급합니다.

 

육두구는 향이 강해 사향 향기가 나는 호두(nutmeg)라는 별칭을 가질 만큼 사랑을 받았는데, 향이 강해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주는 효능이 후추보다 뛰어나서 후추보다 비싼 값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에게 솔깃했듯이 카를로스 1세도 마젤란의 말에 솔깃하게 됩니다. 콜럼버스(Columbus)보다 마젤란의 아이디어가 기발했기 때문입니다.

 

1500년대 초는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를 둘로 나누어 지배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아프리카 서쪽 끝 앞바다에서 480km 떨어진 곳을 기준으로 하여 서쪽은 스페인령,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구분하여 지배한다는 조약)이 유럽의 지배질서였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으로는 말루쿠제도(Maluku)로 가는 길도, 인도로 가는 길도 막힌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약의 맹점은 대서양을 기준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둥근 지구를 돌아 반대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마젤란은 조약의 허점을 짚어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가는 건 조약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왕을 설득합니다. 남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이 수북하게 들어오고는 있지만, 후추와 육두구를 구입하기 위해 나가는 양도 만만하지 않으니 카르롤스 1세는 분명 솔깃했을 겁니다.

 

마젤란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여졌고 카를로스 1세는 5대의 함선을 내어주며 그의 탐험을 독려하게 됩니다. 왕이 움직이자, 향료무역을 독점한 포르투갈이 때문에 이문이 많지 않았던 상인들이 대박을 꿈꾸며 전주로 참여하여 그의 탐험을 돕습니다. 그렇게 구성된 세계 최초의 지구일주 탐험대는 5척의 함선에 240명이 승선하여 출발합니다. 그 해가 1519년인데, 기념될만한 해입니다.

 

인도의 무굴제국은 그때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바부르(Babur)는 1526년에야 델리(Delhi)에 입성하고 그의 손자 악바르(Akbar)는 1590년이 되어서야 고아 주(Goa)가 지척인 데카고원(Deccan Plateau)까지 세력을 확장합니다. 마젤란이 인도 고아에 머물며 향료무역을 활발히 했던 1510년 인도는 여러 힌두 왕국이 대립하던 시기여서 포르투갈과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는 별 저항 없이 향료무역으로 짭짤한 재미를 봅니다.

 

동아시아는 어떤가요, 명은 전성기를 지나 기울어가던 중입니다. 1594년에 일어난 임진란에 개입하며 국운이 급격히 기울었다고 하나, 변방의 국지전 하나 이겨내지 못할 만큼 명은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대 항해의 막을 연 마젤란의 도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젤란이 대서양을 건너 인도로 간다는 소식은 포르투갈을 긴장시킵니다.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는 마젤란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리고 마젤란이 출항하자 그의 함대를 쫓아 추격함대를 보냅니다. 마젤란은 이제 선택이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것입니다. 노련한 선장, 마젤란은 추격함대를 따돌리고 2달 후에는 대서양을 건너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와 스페인 식민지인 라플라타 강(Rio La Plata, 지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닿았고, 다시 해안선을 따라 남으로 항해를 이어 갑니다.

 

그러던 중 첫 번째 난관에 봉착합니다. 5대의 함선 중 스페인계 선장이 이끄는 산 안토니아호, 빅토리이호, 콘셉시온호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무력으로 반란을 제압한 마젤란은 주동자 카르타헤나(Cartagena_는 선장 대우라며 파타고니아에 홀로 내리게 했고 다른 두 선장은 반란죄를 물어 사형시킵니다.

 

반면,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 반기를 든 선장이었음에도 용서해줍니다. 그리고 반란에 동조한 선원도 모두 죄가 없다며 방면하여 탐험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마무리합니다.

 

반란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마젤란의 항해는 지체 없이 항해를 재개하여 남미대륙의 끝에 다다릅니다. 그러나 그 땅은 바람과 돌풍, 극지방의 한기가 지배하는 혹한의 땅이었습니다. 얼마나 격랑이 심했으면 몸을 돛대에 묶어야 했다는 기록을 남겼을까요, 그렇게 폭풍과 사투를 벌이던 함대는 고요한 해협에 들어섭니다.

 

대륙의 끝과 끝을 이어주는 작은 해협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자연 수로여서 폭풍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선택이었지만 좁은 수로엔 돌출된 암초가 많고 지형이 복잡하게 얽혀있어 출구가 어딘지 알기 어렵습니다.

 

탐험대는 악마의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을 겁니다. 마젤란 함대는 이 수로를 빠져나오는 데 한 달이나 허비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수로에서 1대의 함선이 좌초되는 피해를 입고, 암초에 걸린 함선 한 척이 명령을 어기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겨우 수로를 빠져나와 태평양을 만났을 때 마젤란의 함선은 5대에서 3대로 줄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과 희망을 갖고 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육지가 푼타아레나스입니다.

 

푼타아레나스에서 마젤란은 충분히 휴식하고 필요한 물자를 채웠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평화로웠으면 새로운 바다에 ‘평화의 바다(Mare Pacificum, 태평양)’라는 이름을 주었을까요, 그런데 마젤란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태평양은 그가 본 어느 바다보다 크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으로 태평양을 만난 유럽인은 콜롬비아의 총독이었던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uñez de Balboa)입니다. 그 탐험대에 피사로도 동행했었죠, 발보아는 태평양에 닿아 바닷가에 사는 원주민에게 바다가 얼마나 크냐고 물었고 원주민은 작은 바다라고 말해줍니다. 태평양은 발보아를 통해 작은 바다로 유럽에 알려졌고 마젤란이 태평양과 마주한 건 그로부터 6년 뒤입니다.

 

마젤란은 발보아가 전해준 대로 작은 바다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금방 건너리라는 희망을 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태평양은 그리 호락호락한 작은 바다가 아닙니다.

 

푼타아레나스를 떠난 마젤란 함대는 괌에 닿기까지 4개월을 태평양에서 헤매게 됩니다. 세비야 항(Sevilla)을 떠난 지 2달 만에 대서양을 건너 리우데자네이루에 닿은 항해기록을 볼 때 마젤란은 길어야 2달이 안 걸릴 것으로 판단했을지 모릅니다. 마젤란의 항로를 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항해하지 않고 적도를 건너 사선으로 항해를 시도합니다. 태평양이 작은 바다라고 생각하기 전엔 무모한 항로입니다.

 

그 결과 4달이 걸렸으니 식수도, 식량도 바닥났을 뿐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과 공포가 탐험선을 유령같이 집어삼켰을 겁니다. 선원들은 기르던 개와 고양이는 물론 돛을 고정시킨 가죽끈을 풀어 수프를 만들어 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런 위기에서도 항해를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마젤란의 지도력이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괌을 지나 필리핀 세부 섬(Cebu)에서 닻을 내린 마젤란은 막탄 섬(Mactan Island)의 라푸라푸 부족과의 전투에서 12명의 부하와 함께 전사하게 됩니다. 마젤란이 전사하고 혼란스런 탐험대를 추스른 건 마젤란이 선상반란을 진압하고 뒤처리 과정에서 반란죄를 용서해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입니다. 그는 급히 선원들을 모아 세부 섬을 탈출하고 마젤란의 탐험을 이어갑니다.

 

마젤란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4명의 선장 중 한 명은 파타고니아에 내리게 하고, 두 명은 사형을 시켰으며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는 반란을 일으킨 선장 중 한 명이었음에도 용서해줍니다. 아마도 그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협조했거나, 이런 사태에 대비해 마젤란이 살려둔 게 아닐까요,

 

하여튼 그는 살아서 남은 함선 3척을 이끌고 세부를 탈출합니다. 그리고 선원이 부족하여 함선 하나를 파괴하고 두 대만으로 항해를 이어나갑니다.

 

필리핀에 이르렀으면 이젠 되돌아가는 것보다 아프리카를 돌아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이 훨씬 빠를 뿐 아니라 포르투갈 무역선이 오가는 익히 잘 알려진 항로여서 그들에게도 다른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탐험대는 세부 섬을 지나 마젤란이 그토록 도착하고자 한 말루쿠 제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육두구라 불리는 향료를 가득 싣습니다.

 

육두구는 현금성 있는 향료여서 탐험대는 육두구를 주며 필요한 식량과 물을 얻습니다. 당시 인도양은 포르투갈의 내해(內海)라 할 만큼 곳곳은 포르투갈 통제권이었고 아랍상인들 역시 무료로 도와주지 않습니다.

 

육두구로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바꾸어가며 탐험대는 아프리카를 돌아 다시 대서양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기항지인 세비야 항으로 접근해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보베르데(Cape Verde 세네갈 앞바다의 군도로 이곳을 지나면 스페인으로 가는 직항항로로 연결)군도에 포르투갈 군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탐험선을 발견한 포르투갈 군함은 주저 없이 공격을 시작했고, 탐험대는 26톤의 향료 전부 넘겨주는 조건으로 카보베르데 군도(Cabo Verde)를 통과하게 됩니다.

 

힘들게 가져와 잘 바치고 돌아가는 바보들이라고 비아냥거리며 포르투갈군의 야유를 뒤로하고 군도를 통과한 탐험대는 3년 만에 세비야 항에 귀항하게 됩니다. 탐험대는 5척의 배에 240명이었던 출발할 때와 달리 한 척의 배에 18명의 생존자가 전부였습니다. 93%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나마도 육두구가 없었다면 그들은 인도양을 벗어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결국, 육두구는 마젤란이 항해를 시작하는 이유였으며 탐험대가 살아 돌아오게 한 이유였으니 인류사에 남은 한 획을 긋는데 일조한 셈입니다.

 

3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돈 남자들의 이야기는 처절하고 영웅적임에도 오랫동안 배척당합니다. 육두구를 가져오지 못했으니 함선을 5척이나 내준 왕실도 손해, 240명의 선원임금을 댄 상인들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카를로스 1세는 “엘카노 그대는 나를 위해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이다.”라고 치켜세웠다지만 이탈리아인 신분으로 탐험선에 오른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가 항해과정을 기록한 [세계 일주]를 저술했음에도 그 시대에 출간되지 못하고 300년이 지난 1800년에 되어서야 출간되었음을 볼 때 카를로스 1세도, 상인들도 마음이 몹시 상했나 봅니다.


푼타 아레나스를 떠나 우수아이아로 연결되는 버스는 하루 한편입니다. 버스는 2시간을 달려 마젤란 해협에 닿습니다. 마젤란 함선이 풍랑을 피해 얼떨결에 들어온 좁은 해협이죠, 마젤란은 이 해협에서 벗어나면서 잔잔한 바다와 만납니다. 그리고는 돌풍에서 벗어나 잔잔한 바다를 만난 것에 감읍하며 평화로운 바다, 태평양이라고 이름 붙이죠, 마젤란 해협을 건너는 바지선에 올라 배를 쫓는 기러기 떼를 바라봅니다.

 

마젤란은 육두구만을 쫓았을까요… 세상을 한 바퀴 돌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육두구를 팔지는 않았을까요… 모든 시각은 인도와 향료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사람의 내면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이지 삶 자체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고되고 혹독한 일을 하는 이유가 편안한 삶을 위해서일까요, 그보다 이상과 명예는 아닐까요… 콜럼버스도 마젤란도 천박한 상인의 밑거름처럼 표현하는 책들을 보면 그 뿐일까라는 의혹을 갖습니다. 그들에게 꿈이 있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데 돈을 끌어들이는 동안은 돈이기에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돈이 되는 꿈을 판 게 아닐까요…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꿈을 이룬 것입니다.

 

돈은 투자한 사람들의 몫이고 자신이 추구한 건 꿈이었으니까요.. 배는 10분 이동하더니 묵직한 철문을 반대편에 걸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시 버스는 저를 싣고 우수아이아로 6시간을 달려갑니다. 마젤란 해협 건너 진정한 대륙의 끝이죠.

 

우수아이아((Ushuaia)는 불의 대지(Tierra Del Fuego)라 불리는 땅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으리라 생각한 마젤란은 해안을 따라 반짝이는 모닥불을 보고 심히 놀랐을 것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신대륙이려니 했는데, 지구촌에 어디도 새로운 대륙, 심지어 섬도 없었으니까요, 다 주인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땅의 주인으로 알려진 야마나(Yamana)족입니다. 안데스의 심장에서 시작해 잘근잘근 밟으며 내려온 안데스 산줄기 여행은 우수아이아에 이르러 발가락에 닿은 듯합니다. 엄지발가락이 몸의 중심을 잡듯이 우수아이아는 안데스 산줄기 전체가 바로 서도록 발가락을 곧추세우고 있어 보입니다.

 

우수아이아의 상징인 대륙의 끝(Fin Del Mundo) 기념 판에 가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여행자 사무실(tourism office)을 찾아가 여권에 도장을 찍습니다.

 

여기는 새로운 땅이니까요, 길 한켠에 세워진 이정표를 바라봅니다. 유명 도시를 가리키는 방향타에는 동경, 뉴욕, 북경은 있는 데 반해 서울은 아직 없습니다. 이 방향으로 달려가면 서울이겠군요, 그렇게 짤막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우수아이아에서 보내는 3일간 여행을 점검합니다.

 

하루는 비글해협 트레킹(Beagle Channel)으로 배정하고 하루는 펭귄 섬을 찾아 펭귄과 총총걸음을 걸어보고 하루는 안데스의 끝이며 우수아이아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마을의 윗산으로 트레킹 시간을 갖습니다.

 

현재는 서울 방향타가 있는 푼타아레나스

 

비글해협 트레킹은 3~4시간의 짧은 트레킹이지만 Tierra del Fuego 국립공원 보호구를 걷기 때문에 사전에 트레킹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비글해협은 마젤란 해협보다 남쪽에 위치한 해협으로 해협을 두고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국경을 가르고 있습니다. 허가받는다는 건 선택을 의미하기도 해서 비글해협을 걷는 기분은 우쭐합니다.

 

또 숲길을 나와 평온한 해협을 바라보면 마젤란과 240인의 용자를 떠올리기에 적합합니다. 마젤란이 좀 더 대륙을 따라 항해하여 비글해협으로 빠져나갔다면 2대의 함선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마젤란 해협은 해안선이 복잡하고 오리무중인 반면 비글해협은 단순하고 직선에 가깝습니다.

 

비글해협 트레킹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와 양 아사도(남미식 바비큐)식당을 찾아갑니다. 한 접시 고기를 담아 로마 시대부터 애용하던 후추를 듬뿍 뿌리고 한입 베어 무니, 세상을 바꾼 향료의 강한 파급력에 혀끝을 자극합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끌어들인 향료의 매력, 저도 습관적으로 후추를 집어 드는걸 보면 로마와 유럽뿐 아니라 세상을 지배한 듯합니다.

 

계영배(戒盈盃)라는 잔이 있습니다. 술잔의 7할까지만 채우는 계영배는 “넘침을 경계하는 잔”으로 술잔 하나에서도 스스로 욕망을 경계하라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양은 항상 자족하며 살았고 서구는 늘 갈구하며 살았습니다. 동양이 7할을 지키며 멋을 향유하는 동안 넘쳐도 좋다고 덤빈 서구는 풍요의 과실을 가져갔습니다.

 

헛기침이 나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신사답게 살고 싶은데, 서구를 쫓는 우리 소주잔도 그렇고 사케도 그렇고 백 알도 꽉꽉 넘치도록 채웁니다. 되려 서구의 와인 잔은 계영배의 여유가 넘칩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계영배를 생각해봅니다. 언제나 동양은 계영배의 여유를 되가져오게 될까요.

 

비글해협 해안가

 

식당을 나와 야마나 민속 박물관을 둘러 익숙한 원시 부족의 물품들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펭귄 크루즈를 떠납니다. 오후 4시에 출발하는 크루즈는 펭귄 섬을 찾아 바닷길을 가릅니다.

 

섬엔 뒤뚱뒤뚱 불편한 걸음을 걷는 펭귄뿐 아니라 황제 가마우지가 물 위를 발버둥 칩니다. 황제 가마우지는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발견하고 이름 붙인 그의 연구대상이었습니다. 새는 새인데 날지 못하는 새라면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다윈은 날개를 퇴화시키고 몸을 살찌운 가마우지의 선택에 골몰합니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제도(Islas Galapagos)에서 해양 이구아나와 육지 이구아나의 차이를 관찰하며 환경에 적응하려는 자연스러운 생존과정이란 걸 이해합니다. 자연선택 이론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학문이 더 발전한 현대에는 자연선택을 돌연변이의 승리라고 말을 바꿉니다.

 

펭귄섬의 펭귄들

 

최초의 생명체인 세균은 단단한 세포벽을 갖고 있어 자유로운 활동이 불가능하고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증식하게 되니 돌연변이 없는 종의 번식이 이어집니다. 그런 따분함이 싫었던 어떤 돌연변이가 세포벽을 뛰쳐나옵니다.

 

최초의 진화죠, 세포벽을 뛰쳐나온 놈은 자신을 막는 단단한 벽이 없으니 마음대로 변신을 꾀합니다. 이를 모든 생명체의 조상인 진핵세포의 탄생이라 합니다. 이 사건은 무려 5억5천 만 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지구 상엔 새로운 진화가 시작됩니다.

 

진화는 더디고 미세한 변화만을 가져오다, 천만년쯤 지나 진화와 종의 분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때를 지질학적 구분으로 따지면 캄브리아기(Cambrian Period, 5억 4천만 년 ~ 4억8천만 년 전)입니다. 그런데 캄브리아기의 진화는 작은 변화들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자연선택이론의 틀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다윈은 여기서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단기간에 엄청난 폭발력으로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평화롭던 바다에 포식자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포식자가 탄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포식자 역시 최초의 세균에서 진화한 돌연변이 후손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포식자가 없는 바닷속 세상은 모든 생명체가 물 흐름에 자신을 맡기며 흘러다니는 게 일상이었는데, 포식자가 나타나며 도망 다녀야 하는 생존게임이 시작됩니다. 생명체는 포식자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부속기관을 발달시키기 시작합니다. 지느러미, 팔, 다리, 그 외에도 시각, 촉각, 청각 등 필요한 기관을 발전시킵니다. 생명체는 발전시키기 쉬운 부속기관을 진화시키며 분화는 더욱 급하게 일어납니다.

 

자연선택의 기본 개념은 ‘진화는 작은 변화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갑작스러운 폭발은 없다.’ 는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의 동일 과정설에서 시작합니다. 선대의 기억은 미토콘드리아 DNA에 유전정보로 남겨져 다음 세대에 전달되고 자연변화에 잘 적응하는 형태로 조금씩 진화한다는 설인데. 다윈의 자연선택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윈은 말년에 “자신의 진화론에 오류가 있다면 그건 캄브리아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캄브리아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첫 생명체는 원핵세포인 세균에서 이탈한 돌연변이였습니다. 그가 진핵세포를 만듭니다. 그 돌연변이는 세균사회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을 때 그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800만 년 전 원숭이에서 분리된 사람과는 새로운 돌연변이를 만납니다.

 

엉덩이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원인은 너무 큰 엉덩이 때문에 이동이 불편했고, 남들같이 나무를 잘 기어오르지도 못합니다. 따돌림받던 돌연변이는 그만 일어서 버립니다.

 

이로써 진정한 인간의 탄생이 시작됩니다. 직립을 하려면 엉덩이 근육이 상부를 지탱해주어야 하는데, 엉덩이가 커서 불편했던 돌연변이 원인은 엉덩이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었으니 돌연변이가 진화의 아이콘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으로도 캄브리아기의 진화 대폭발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도대체 진화란 무엇일까요, 그런데 충분하기도 합니다. 진화란 환경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니 급격한 환경변화엔 급격히 자신을 바꿀 테고, 환경변화가 없다면 천천히 진행되겠죠, 그리고 진화에 성공한 개체는 다음 세대에 유전 정보를 남기고 진화에 실패한 개체는 사라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많은 환경변화를 안고 사는 인간 세상, 환경이 변화면 인간도 변하겠죠, 변화하다 지치면 사라지는 길을 택할지도 모릅니다. 그때쯤이면 인간보다 더 잘 적응한 생명체가 행성의 주인행세를 할 테죠 가마우지는 날지 않아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생선이 있어 날기를 그만두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다의 물고기가 줄어들면 다시 몸집을 줄이고 날개를 크게 키워 날기를 시도할 겁니다. 황제 가마우지가 다시 날지 않았으면 편하겠습니다. 인간도 화성으로 이사 간다고 번잡을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안데스 줄기 여행의 마지막으로 안데스의 끝인 우수아이아의 산을 오릅니다. 나무가 묵직한 삼림지대를 두 시간 오르면 알파인 초지가 펼쳐진 융단 대지가 나옵니다. 밟고 지나갈 때마다 식물은 이끼류같이 뭉쳐있어 조심스럽게 밟지 않으면 식물에 파헤쳐져 가슴이 쓸립니다. 그런 길을 두 시간 걸으니 이젠 너덜지대가 반깁니다. 그러면서 가파른 오르막이 멀지 않음을 알립니다.

 

그렇게 6시간을 걸어 도착한 정상은 우수아이아의 뒷산입니다. 앞으로는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바다가 수놓고 있는데, 바다에 태평양 대서양이 있기나 한가요, 바닷물은 한 몸으로 때로는 난류로, 때로는 한류로 옷을 바꿔 입으며 지구를 한 바퀴 돕니다.

 

그렇게 지구 곳곳을 돌아 원위치하는 데 몇 년 걸리기도 합니다. 저 물도 얼마 있으면 제주도 앞바다를 지날 것입니다. 어여 내려가 물에다 저의 마음을 씻어야겠습니다. 여행이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 제주도에서 건져보게요… 지금 제 마음이 그때는 어떻게 변해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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