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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빠루] 할아버지와 스테인리스 스틸 개밥그릇

[나비와빠루] 제 39부

 

[노트펫]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커피를 고르는 일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같은 종류의 캔 커피를 온라인 마트에서 대량 구매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사람은 돈의 잣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며칠에 한 번 편의점에 가서 할인하는 것 중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도 소소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어제는 냉장고에서 동이 난 캔 커피를 채우는 날이었다. 무슨 커피를 고를지 고민하면서 즐겁게 편의점 문을 열었다. 문에는 귀여운 그림 하나가 보였다. “포켓몬빵 없어요.”라는 글을 들고 있는 슬픈 표정의 피카추였다. 주인 말로는 아르바이트생이 며칠 전에 붙여 놓은 것이라고 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같은 질문을 하니 아예 그림을 붙인 것 같다는 설명이다.

 

전국적인 포켓몬빵 열풍은 추억 때문이다. 하지만 추억은 기억 그대로의 날것이 아니다. 기억을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게 만든 것이 바로 추억이다. 자연계에서도 추억과 비슷한 것이 있다. 꿀벌은 여러 꽃가루들을 모아 자신만의 소화효소를 동원하여 ‘천상의 맛’이 나는 에너지원인 벌꿀을 만든다. 사람의 기억이나 꿀벌의 벌꿀이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 같다.

 

봄은 정리정돈의 계절이다. 겨우내 입었던 옷들은 세탁소로 가고 그동안 옷장에 묵혔던 옷들은 다시 햇살을 받게 된다. 이를 위해 집안 곳곳은 먼지떨이와 청소기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어제 오후는 베란다에 붙은 작은 창고가 정리 대상이 되었다.

 

포켓몬빵이 없는 편의점에서 산 캔 커피가 주는 카페인의 힘으로 청소에 나섰다. 창고 문을 여니 누렇게 변색이 된 오래 된 종이 박스가 보였다. 먼지가 쌓인 박스를 여니 오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금속 그릇이 보였다. 그 순간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게 맺히고 말았다. 포켓몬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아련한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깨끗이 닦은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 수십 년 만에 햇볕을 다시 받았지만. 제품에 이상이 없으므로 다시 식기로 사용할 예정이다. 2022년 4월 촬영
깨끗이 닦은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 수십 년 만에 햇볕을 다시 받았지만. 제품에 이상이 없으므로 다시 식기로 사용할 예정이다. 2022년 4월 촬영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위생에 대해 철두철미했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나비와 빠루의 밥그릇들을 세제를 풀어 깨끗하게 물로 세척했다. 그리고 햇볕이 잘 드는 마당에서 일광 건조했다. 할아버지의 손을 거친 것들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왜 이렇게 깨끗하게 개밥그릇을 씻으시냐는 손자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너도 깨끗한 그릇에 밥을 먹고 싶지 않니?”라고 웃으시면서 대답하셨다. 할아버지의 웃음과 동물에 대한 사랑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금속 그릇은 녹이 슬지 않기 때문에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이라고 불리는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제품들은 물에 자주 닿는 요리 분야에서 많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광범위하게 보급된 것으로 전해진다.

 

할아버지는 나비와 빠루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동네 그릇 가게에 가서 스테인리스 스틸 그릇들을 몇 개 사오셨다. 그때 할아버지가 사신 빠루의 밥그릇은 창고의 상자에서 나온 것과 동일 종류의 것이다.

 

스테인리스스틸 그릇답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녹도 하나 없었다. 종이 상자 안에는 스테인리스스틸 그릇 이외에도 부모님의 사진과 편지 등도 같이 들어있었다.

 

필자는 결혼 후에도 한동안 부모님과 같이 살다가 분가를 했다. 그래서 간혹 오래된 짐을 풀면 이렇게 예상외의 물건들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처럼 나비나 빠루가 사용하던 물품과 같은 종류의 것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추억이 주는 이 모든 행복은 오후의 노곤함을 극복하게 만든 캔 커피 속 카페인의 힘 덕분인 것 같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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